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여운홍 (문단 편집) == 생애 == [[1891년]] [[경기도]] 양근군(현 [[양평군]])에서 태어났다. [[한양|한성부]] [[경신학교]], 미국 [[우스터 대학교]]를 졸업하였다. [[1917년]] 당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하자 윌슨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소개장을 얻은 뒤 [[11월 15일]] [[백악관]]을 찾아 윌슨 대통령을 만나려 했지만 윌슨의 비서가 면담을 거부해 성과 없이 되돌아왔다. [[1919년]] [[3.1 운동]] 이후 [[김규식]]과 프랑스 [[파리 강화 회의]]에 참석하였다. 같은 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 [[1920년]] [[상하이]] 인성학교 [[교장]] 등을 지내고 귀국했다. 귀국 후 [[보성전문학교]] [[영문과]] [[교수]]를 역임하였다. [[일제강점기]] 말기인 [[1941년]] [[태평양 전쟁]] 이후 일제의 회유에 넘어가 시국강연을 하고 [[친일]] 논문을 쓰는 등 친일 행적을 보였다. [[1945년]] 8월 형 [[여운형]]이 준비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하였다. [[8.15 광복]] 뒤에는 [[여운형]], [[김규식]] 등과 함께 [[좌우 합작 운동]]에 참여하였다. 이후 [[조선인민당]], [[근로인민당]]에 참여했으나 [[1946년]] [[박헌영]]의 노선에 반발하여 조선인민당을 탈당하여 [[사회민주당]] 당수를 지냈고 [[1947년]] [[12월]] 민족자주연맹 중앙집행위원으로서 활동했다. [[1948년]] [[4월]] 남북협상에 참여한 여운홍은 [[평양]]을 방문해 발언권을 요구했지만 [[박헌영]]의 위협을 받았다. 결국 협상을 포기하고 되돌아왔다. 8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제2대 민의원, 제5대 참의원 등을 지냈다. 그 밖에 자유당의 선전부장과 민주공화당 선거대책위원장, 공화당 상임고문 등을 지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기도 양평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대한국민당 [[류래완]]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서울]]을 탈출하지 못하였고 [[장건상]]과 함께 [[북한군]]의 감시를 받다 가까스로 탈출하여 [[납북]]은 면했지만 북한을 지지하는 국회의원 연판장에 서명한 것이 적발되어 몇달간 의원직이 정지됐었다. [[1952년]] [[자유당]]에 입당하여 선전 부장을 역임하였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기도 [[대한민국 참의원|참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63년]] [[자유민주당(1963년)|자유민주당]]에 있다가 자유민주당을 탈당하여 [[민주공화당]]에 입당하였다. 이후 민주공화당에서 선거대책위원장, 상임 고문 등을 지냈다.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종로구(선거구)|종로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정당]] [[전진한]]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말년에는 형 여운형의 일대기를 담은 몽양 여운형이라는 책을 출간해냈다. 그러다 [[1973년]]에 82세를 일기로 자택에서 사망했다. [[일제강점기]] 말기의 친일 행적 때문에 사후 [[한국독립당(1940년)|한국독립당]] 당원 김승학이 작성한 친일파 명단, 교육 부문에 수록되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선정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