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여운형 (문단 편집) == 사망 == [[파일:9153676511ba48b49ee.jpg]] [[파일:공판장의 한지근.jpg]] [* 위의 사진은 암살 당시 입은 옷이며, 아래의 사진은 공판장에 선 암살 사건의 범인 한지근의 사진이다.] >'''조국... 조선...''' >---- > 피격 직후 단말마처럼 내뱉은 최후의 유언. 1947년 7월 19일, 서울특별시 혜화동 로터리에서 한지근(韓智根)[* 1927년생이며, 수사 당시 ' 1929년 생 한지근 ' 이라며 거짓신분을 밝힘. 본명 이필형(李弼炯).]이라는 청년에 의해 암살당했다. 총격 후 범인은 곧바로 도주했다. 경호원 박성복[* 1920 ~ ?]이 범인을 추격하였지만 갑자기 등장한 경찰에 의해 오히려 범인으로 몰려 시간만 지체되고 말았다. 이후 경찰은 이 청년을 체포한 후, 사건을 그의 단독범행으로 결론 내리고 수사를 종결하였다. 한지근은 공판장에서 사형을 구형받은 후, 무기체형을 언도받았다. 수감된 후에는 인쇄일을 배우며 모범수로 지냈다. 그러나 [[1950년]] 6.25 전쟁 이후 행방불명 되었다. 여운형 암살사건의 진상은 여운형이 사망한 지 27년 후인 1974년이 되어서야, 여운형을 암살하는데 가담한 4명이 신문지상을 통해 자신들의 이야기를 밝힘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공소시효가 지나 더 이상 처벌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이들은, 한지근과 자신들이 어떻게 여운형을 암살했는지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이 설명에 따르면 한지근 등 여운형 암살에 가담한 사람들은, 1945년 12월 30일 발생한 송진우 암살사건의 주범 한현우(韓賢宇)의 집에서, ‘격몽의숙’ 관련자들과 교유하며 극우적인 사고를 키워나갔다. 여기서 이들은 당시 극우 테러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었던 한국민주당 창당맴버이자 ‘혁신탐정단’의 [[양근환]](梁謹煥), ‘[[백의사]]’의 [[염동진]](廉東鎭)과 접촉하며 테러 대상을 물색하였다. 그리고 여운형이 ‘민족분열에 책임이 있는 야심가’라는 결론을 내리고 그를 제거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과정에서 양근환과 염동진은 여운형 암살사건 가담자들에게 무기를 제공하였다. 1974년에 나온 여운형 암살사건 가담자들의 주장은 사후적이고 일방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곧 그 신빙성 여부에 의문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이 나온 직후 이 문제를 조사한 검찰에 따르면, 이들의 설명이 여운형 암살사건 당시 한지근을 조사했을 때의 기록과 상당히 가깝게 들어맞았다고 증언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