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여운형 (문단 편집) == 가족 관계와 가정 생활 == 가정 생활에 있어서 비판이 많다. 이하에서는 간략히 나오지만, 여운형의 사생아 문제는 지금도 결론이 나지 않는 떡밥덩어리며, 양파 껍질처럼 끝이 없다고 한다. 비판자들 입장에서는 도덕성 문제로 커지지만, 옹호자 측에서는 '드문 일이 아니었고, 사생활보다는 공적인 기여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하의 내용에 대한 판단은 개인이 알아서. 먼저 14살에 집안의 권고에 따라 [[결혼]](조혼)하지만 17세 무렵 아내가 [[임신]] 6개월 만에 사망한다. 그 뒤로 일시적으로 어린 [[기생]]을 가까이 한 적 있었는데 재미있게 놀고 나니 기분이 찜찜하고 죄책감이 들어서 아버지한테 다 털어놓고 기생을 가까이 하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 한편 위독한 병중이었던 어머니는 죽기 전에 며느리를 빨리 보고 싶다며 혼사를 정해버렸고 몽양은 19세에 자기보다 1살 많은, 학력이 없는 평범한 여인인 진상하 씨와 재혼했다.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거짓이 아니라, 삼천리 제7권 제11호(1935년 12월 1일)에 실린 인터뷰 기사[* 제목은 夫婦座談會:二十年만에 新婚 氣分나신다는 呂運亨氏 夫妻.(부부좌담회:이십년 만에 신혼 기분 나신다는 여운형씨 부처) 물론 예나 지금이나 기사 제목은 낚시를 위한 떡밥이다.]와 여운형 측근의 아들이고 실제 그를 알고 지냈던 이란 씨의 회고에 근거해 적어놓은 것이다. 조선 말기에는 여운형도 그렇고 거의 다 집 안에서 혼사를 정해서 멋모르고 구식 결혼을 했는데 애정 없는 결혼 생활은 잘 될 턱이 없었다. 인터뷰 내용을 볼 때 여운형은 아무리 당시 시대가 시대였다고 하지만 스스로 연애 결혼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해 불만과 앙금이 쌓였던 모양이다. 집을 다녀간 박헌영에게 돈으로 쓰라고 은수저 몰래 준 걸 알아채지 못하고 은수저 어디 갔나, 한참 찾아다니는 아내가 미련하다고 한 얘기에서도 그랬고 내조해주는 아내에게 고맙다고 하지는 못할망정 아내가 순순한 곰같이 행동한 게 미련해보인다고 싫어한 듯하다. 결혼 2년차 21세의 나이에 홀연히 강원도 강릉으로 떠나서 초당 의숙의 교사가 되어 학생을 가르치고, 시국이 안 되니 소학교 교사 때려 치고 평양에 있는 예수회 장로교 신학교에 입학한 뒤 중국 금릉 대학에 입학하고 해서 수년간 아내, 자식 간 사실상 별거나 다름없는 생활을 했다. 하지만 시부모를 모시고 있었던 아내는 자식 부양 문제 때문에 더 이상 못 참겠어서 맏아들 봉구를 데리고 남편이 있는 상하이로 떠버렸다. 이렇게 해서 몽양이 중국으로 건너 간지 8년 만에 가족이 상봉하게 되었다. 그 후 몽양이 체포되어 조선으로 송환되기 이전까지 상하이에서 2년~3년 정도 가정을 꾸리고 살았다. 여운형은 인터뷰에서 '''"부부간의 참사랑이란 것도 그때부터야 비로소 알게 되었구려. 또 그곳에서 지금 있는 아이들 넷을 또 낳았지요."'''라고 말했다. 그런데 깨달음이 그렇게 깊지 못했던 모양이다. 까놓고 말하자면 가장으로서는 형편없었다. 사방팔방 분주하게 돌아다녔고 적들에게 쫓기다보니 몇날 며칠 집을 안 들어오는 게 일상이었고 아내 진씨는 걱정 때문에 잠을 제대로 못 잤다고 한다. 이하 인터뷰 중 진씨의 회상. > "...가슴이 타고 하로밤에 검은 머리 다 희여지는 듯 속을 썩인 적도 여러 번이지만 상해 있슬 적에 한 번 이런 일이 있었는데 그때 생각은 늘 잊혀 아니집데다. 「바깥어른」이 한창 몸을 피해서 다니시든 철인데 장개석을 반대하는 운동이라든지요. 그런 운동에 주야 불분하고 돌아다니실 때 일인데요. 그래서 며칠에 한 번씩 잠깐 잠깐씩 번개같이 집에 다녀오시고 가시고 하던 철인데 하루는 며칠을 어데 나가시어 집에라곤 소식조차 알 수 없더니 새벽녘에 들어오셨지요. 매우 초조하고 긴장한 얼굴빛을 지으시면서 "밥을 좀 달라"고 말씀하기에 얼른 진지 상을 차려드렸더니 황겁하게 마구 잡수실 적에 불시에 어디서 나왔는지 총과 칼을 한 무장한 중국 군대들이 휙-몰려와서 포위를 하려들지요. 그때 주인은 얼는 눈치채이고 밥 숟가락을 그냥 던지고선 그냥 날 새게 뒷 담장을 뛰어너머 어대로인지 종적을 감추셨는데 그 뒤 사오일이 되도록 아무 소식이 없으셧구려. 내 마음이 얼마나 탓겠어요. 그럴 때면 나는 밤마다 이슬을 마저 가며 뒷문박에 서서 행여나 오시는 가고 긴긴밤을 서서 새엇지요." 여운형은 이걸 듣고 옆에서 '''"그런 일도 있었나?"'''하면서 허허허 웃었고 부인은 '''"그것뿐이겠어요?"'''라고 쏘아붙였다. 게다가 여운형은 밥돌이였다. 그가 야자 이만규 씨의 집에 오랫동안 기거한 적이 있었는데 만규 씨 집에서 그의 별명은 "밥 많이 먹는 손님"이었다고 한다. 어떤 책에서는 이만규가 소식가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여운형이 많이 먹는 것처럼 보여서 그런 별명을 붙인 것으로 보인다고 썼으나... 먹성에 대해서는 본인도 인정하였다. >(중략)... 나는 실로 그때 내 건강이 남부럽잖게 상당했더니 만치, 그리고, 기운이 세여서 중국인 2인, 3인을 넘어뜨리고 남을 만했기 때문에 밥 잘 먹기로 또 유명했지요. 한 끼에 여섯 공기, 일곱 공기씩 밥을 먹고도 아무렇지 않았으며, 그 밥 분량이 중국 학생이 먹는 분량의 2배, 3배였으니 유명하지 않을 리가 있나요. - 敎授로 大學生으로 支那 諸大學 時代의 回想, 南京金陵大學 留學時代(呂運亨) 애초에 체격이 장대하고[* 상하이 시절 그의 몸무게가 80kg이었다.] 쉴 틈 없이 돌아다니는 게 습관인데다가 연설도 하고 다녔기 때문에 어찌 보면 당연하지만 아내 입장에서는 독립 운동이고 뭐고 사실상 밥만 축내고 벌어오는 돈은 형편없는데 애는 계속 만드는 최악의 남편이었다... 몽양이 체포되어 조선으로 송환되고서는 상하이 유학 중인 장남 봉구를 빼고 온 가족이 거처를 조선의 계동 집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런데 장남 봉구가 1933년에 상하이 복단 대학에 재학 중 [[장티푸스]]에 걸려 19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되었다. 이 소식을 접했을 당시 여운형은 가출옥된지 몇 달 안 되어 형기가 완료되지 않았기 때문에 해외로 갈 수도 없었고 아버지로서 아무 조처도 할 수 없었다. 차남 홍구는 1940년에 일본의 법정 대학 예과 2년에 유학중 파상풍으로 사망, 이렇게 해서 장남, 차남을 먼저 떠나보냈다. 먼저 떠난 장남과 차남까지 합하면 진씨 아래로 딸 다섯과 아들 셋이다. 딸 여순구가 1942년생 늦둥이로 가족 중 가장 막내고, 본처 외의 여자 사이에서 낳은 자식 둘까지 합하면 실제로 키운 자식만 총 10명이다. 그의 개방적인 성향 때문인지 당시 조선 평균 남자들과 비교해볼 때 여자들과 어울리는 데에 거리낌이 없었던 편이다. 그의 여성관이나 그가 여자를 후렸을 때 사용했을 법한 미사여구를 볼 수 있는 글은 당시 조선 내의 유명 인사들 글을 모은 학해(學海)라는 책에 기고한 《신춘(新春)을 맞이하는 젊은 여성들》이라[[https://web.archive.org/web/20190810131801/http://search.i815.or.kr/ImageViewer/ImageViewer.jsp?tid=co&id=1-L00512-000|보러가기(17쪽부터)]]인데, 이 글은 기본적으로 고등 보통학교나 대학교를 졸업하여 사회에 진출할 여학생들을 상대로 계몽적인 의도로 쓴 글이다. 하지만 아무리 당시 문어체의 수준을 고려한다고 해도 '나의 사랑하는 어린 새들', '귀여운 조선의 어린 새들', '학교의 [[나무]] 아래에서 높고 먼 이상에 가슴을 태우며 배회하던 젊은 여인의 맑은 눈동자' 같은 표현에서 그의 성향을 다분히 알 수 있다. 외간 여자와 [[불륜|바람]]난 적이 있는데, 일단 공식적으로 몽양이 데려온 아들만 따져서 2번이라고 말한다. 첫 번째는 해방될 때까지 주변 사람들끼리 공공연한 비밀이었지만, 유부남의 몸으로 일본 여자[* 옹호하는 측에서는 [[기생]]이라는 설을 들고, 우파 측이나 일본 측 자료에서는 미인계 차원에서 일본에서 보낸 밀정이라는 설도 나오곤 한다.]를 만나 1936년에 막내 아들(붕구)을 낳은 것이다. 그 때문에 해방 이후 좌우 갈등으로 여운형이 대차게 까일 때 저명한 독립 운동가가 처자식을 놔두고 일본 여자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낳았다는 얘기가 거대 떡밥이 되어 반대편 진영에 두고두고 씹히게 되었다. 2번째는 1940년대에 도쿄를 들락날락했을 적에 일본에서 조선 미인이라고 소문난 재일 여대생 진옥출과 [[연애]]를 한 사건. 차남이 죽은 지 얼마 안 된 시점에서,[* 이것도 패륜적이라고 대차게 까였다.] 그것도 너무 열애를 한 나머지 '''[[임신]]'''시켜버려서 옥출이 딸(효기)을 낳자 자신이 책임지고 맡아 키우겠다며 조선에 데리고 가서 애를 아내한테 맡겨버렸다. 그 증언으로 아버지가 여운형과 긴밀한 관계에 있었던 이란 씨의 회고에 의하면, 여운형이 재일 유학생을 감독한다는 명분으로 도쿄를 수시로 오갈 때 아는 학생들 학비가 필요하다고 광산업을 하는 아버지께 수시로 돈을 부쳐달라고 했다고 한다. 나중에 아버지가 광산이 잘 안되자 광산을 팔고 도쿄로 가려고 여권을 신청했더니 때마침 도쿄에서 공부하고 있었던 이란 씨의 누나가 편지로 밀고하길 선생님께 돈 드려봤자 연애 자금 드리는 것과 다름없다고 했다고... 여운형 신봉자였던 아버지는 이 글을 읽고 "이것이 무슨 말이냐. 이 위대한 지도자가 연애를 하다니!"하면서 펄쩍 뛰었다고 한다. 여운형은 연애 한 번 못해보고 결혼한 것에 대해 아쉬운 감정을 가지고 있었는데 성격이 체면 차리는 걸 싫어하는데다가 몸을 가만히 두는 걸 절대 못 견뎌 했다(못 움직이게 가둬놓으면 신경통에 걸렸다). 그리고 1940년대 초 도쿄를 오갔을 때는 여운형 인생에서 거의 유일무이하게 공무적으로 할 일이 없었던 기간이었다, 이는 일본 정치인, 특히 군부 쪽 생각은 대중국 전쟁으로 확고해졌기 때문에 더 이상 여운형의 말을 듣지도 않았기 때문. 말하자면 일본에 체류했던 이 기간은 여운형 인생 처음으로 온, 가족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유일한 자유 시간이었고 동료가 광산업을 해서 돈까지 대줬다. 거기에 예쁜 여대생도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더 놀라운 건 진옥출과 연애했을 때 여운형은 유부남에 50대 후반이었는데 진옥출은 미혼의 20대 초반 여대생이었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조선 사나이들에게 불었던 연애 열풍 탓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앞서 이란 씨 아버지가 말한 것처럼 '위대한 지도자가 연애를 한다.'는 사실은 후에 유학생들 사이에 화제가 되었다. 당시 재일 유학생들이 진옥출의 임신 소식을 듣자 그녀가 들락날락한 곳이 여경구(여운형의 오촌 조카)의 집이었으므로 여경구를 의심했는데 애 아빠가 여운형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노인한테 아까운 미인을 빼앗겼다며 내심 부러워하면서 투덜거렸다고 한다. 흥미롭게도 여운형의 이러한 행보는 한국 근대의 연애사와 일맥상통한다. 연애의 사건으로 돌아본 한국 근대사를 조명한 책[[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3110601013630074002|#]]을 참고하면 구한 말 남성들은 대개 가정의 권유로 바라지 않는 조혼을 한 뒤 [[성욕]]에 눈 뜨면 보다 화끈한 연애 대상(좀 더 진전되면 첩으로 들이기도 했지만)으로 기생을 찾았으며, 사회가 근대화되면서 기생들은 [[매춘부]]들에게 자리를 내어주면서 수가 점점 줄어들게 되었고 연애를 권장하는 풍조가 급격히 깔리자 너도 나도(남자라면 신분 고하, 연령을 막론하고 심지어 결혼 여부를 막론하고) 연애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당시 연애 대상은 연애에 개방적인 고보 졸, 대재, 대졸의 신여성(속칭 모던 걸)들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그도 청소년들을 계도하는 성격을 지닌 글에서 "히야까시(ひやかし: '놀리다'라는 뜻의 일본어로 여성에게 수작을 걸거나 하는 것으로 일종의 희롱이라고 볼 수 있다)" 행위를 유난히 불건전한 것이라고 하고 있다. 이건 지금 시대에도 맞는 말이다 물론 이러한 행보는 본처인 진씨 입장에서 놓고 본다면 천하에 둘도 없는 웬수이며 당시의 모던 걸 열풍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일반적인 성도덕과는 엇갈리는 것이었다. 그나마 진씨가 이른바 '구식 여인'으로서 자신은 무식쟁이니 잘난 남편의 활동에 대해 그저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조용히 내조하는 걸 미덕으로 삼아서 그나마 여운형이 무사했지, 그녀가 여운형 어머니같이 드센 여자였으면 집이 뒤집어졌을 것이다. 이러한 그의 화려한 편력 때문에 사생활이 비교적 깨끗한 이승만과 비교당하는 식으로 열심히 까이게 되었다.[* 이승만도 [[임영신]] 전 중앙대 총장과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긴 하다. 독신이던 이승만이 유학생 임영신에게 청혼했으나 거절당하고 이후 [[프란체스카 도너]]와 결혼했다는 설, 둘이 모종의 관계였으나 결혼까진 가지 못했다는 썰, 프란체스카와 결혼한 이후에 임영신이 고백했으나 이승만이 거절했다는 썰 등등 자료에 따라서 이야기가 다르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도 이승만이 도덕적으로 비난받을만한 이유는 없다. 그냥 잘 안풀린 남녀 관계 정도. 반면에 여운형은 누가 봐도 여자 관계는 막장이였다.][* 여운형은 바람을 피우고 외도로 낳은 자식을 본처에게 키우라고 맡기는 당시로서도 사람들이 곱게 보지 않는 행위를 했지만 조강지처를 버리지는 않았고 마음 고생은 시켜도 사이가 특별히 나쁘지는 않았다. 그에 비해 이승만은 본처 박승선의 (동의되지 않은)양자 입양을 의심하여 본처 박승선을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후 외국에서 [[프란체스카 도너]]와 중혼을 한데다가 박승선을 강제로 호적에서 말소시켜 버렸다.] 이렇게 해서 장남, 차남이 먼저 떠나버리고 자식 농사가 늦어졌는데 교육비를 댈 형편이 못 되었다. 게다가 후에는 지속적인 테러 위협에까지 시달리자, 자식들이 죽거나 납치당할까봐 몇몇 딸들과 막내 아들을 [[북한]]의 [[김일성]]한테 보냈다. 여운형이 북한에 건너가서 김일성과 대담을 나눌 때 김일성이 자식들을 자신에게 맡기면 다 해결해주겠다고 했다고 한다. 김일성은 여운형 자식들을 잘 돌봐주었고 모스크바로 유학까지 보내줘서 그들은 고위급 정치인이 되었다. 김일성은 38선을 넘어온 여운형을 몇번 만나면서 회담한 적이 있었고 여운형을 통해 남한 지역 좌익의 세를 늘리려고 했기 때문에 여운형과 나름대로 관계가 괜찮았으며 여운형이 죽은 뒤에도 그를 계속 높게 평가했다. 어찌 보면 이것도 남한에서 여운형이 평가가 절하된 이유 중 하나라고 해야 할 것이다. 여운형 입장에서 자식을 살리려면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사실 그런 위협은 이승만 정권 성립 및 6.25 이후의 일이라서, 당시만 해도 지지도 1위를 달리던 여운형이 그런 문제를 걱정할 리는 없다는 의견도 있지만, 여운형이 직면했던 숱한 [[백색테러]]들을 상기해본다면 그가 느꼈을 위협감은 상당했을 것이라 추론 가능하다. 남동생으로 [[여운홍]]이 있었다. 여운홍은 형과 함께 독립 운동을 하고 해방 후에는 대한민국 국회의원 활동을 했으나, 일제 강점기 후반 독립 운동에 희망을 잃고 서서히 친일 활동으로 선회했다. 때문에 [[친일인명사전]] 전쟁 협력자 72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되는 불명예를 안았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여동생도 2명이 있었다고 한다. 자식이 9명으로, 4남 5녀다. 다만 장남과 차남은 병으로 일찍 떠나보냈고, 여운형이 죽을 때까지 7명의 자식이 살아있었다. 재미있는 점은 그의 자녀들의 이름은 다 九자 돌림인데, 앞 글자는 모두 새(鳥)와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장남 봉구(鳳九 : [[봉황]]), 차남 홍구(鴻九 : [[기러기]]), 3남 영구(鸋九 : [[부엉이]]), 4남 붕구(鵬九 : [[붕]]), 장녀 난구(鸞九 : 난새 - 중국 전설에 나오는 상상의 새), 차녀 연구(鷰九 : [[제비]]), 3녀 원구(鴛九 : [[원앙]]), 4녀 형구(鶑九 : 꾀꼬리), 5녀 순구(鶉九 : [[메추라기]])인데 여기에서도 어린이와 청년들을 어린 새들로 생각했던 그 분의 사상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측근들이 진옥출과의 관계로 낳은 아이의 이름은 '효기'라고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출생년도로 볼 때 효기는 여순구인 듯하다. 장녀 난구와 차녀 연구는 [[이화여자전문학교]]에 다닌 걸 보면 공부를 잘 한 듯하다. 난구의 경우 심장병으로 다니던 [[이화여전]]을 중퇴했다고 한다. 월북한 난구, 연구는 북한 고위 정치인이 되었고 순구, 붕구도 나름대로 직위가 있는 자리에 있다고 한다. 차녀 연구는 <나의 아버지 여운형>(김영사 출간)이라는 책을 내기도 했으며, 차녀와 3녀는 남한을 방문하여 아버지 묘소를 참배하고 간 적 있다. 북한에는 약 30여 명의 유족이 있다고 추정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