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여운형 (문단 편집) == 관련 인물 == * [[안창호]]: 여운형은 청년 시절에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감동하여 독립 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다. 비록 출신 지역이 달랐지만, 상해 임시 정부 시절에 여운형은 안창호를 따랐으며 도산이 국내에 압송된 뒤 옥바라지를 하였고 가출옥되자 마중을 나가고 도산이 죽을 때까지 함께했다. * [[이승만]]: 해방 후에 라이벌이 되지만, 여운형과 이승만은 황성 기독교 청년회에서 같이 활동한적 있었다. 심지어 이승만과 찬송가를 합창한 모습까지 발견되었다고. 하지만 성격 차이, 활동 무대 차이로 인해 친해질 수가 없었다. 특히 이승만과 안창호는 다툼이 심하였을 때 여운형은 안창호를 따랐고, 이승만은 자기 비서가 여운형과 친하게 지내는 것을 보고 비서에게 안창호 똘마니와 어울려 다니지 말라는 식으로 꾸중했다고 한다. * [[조만식]]: 여운형과 함께 안창호를 옥바라지 하였고, 해방 이후에는 같이 건국 준비 위원회 활동을 했다. 해방이 된 직후 서울로 내려와서 같이 일하자고 월남을 권유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지만 조만식은 자신은 평양에서 해야할 일이 많다며 거절했다. * [[김규식]]: 상해 시절에 여운형과 만나고 형님 아우님 하는 절친한 사이였으며, 신한 청년당 대표로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된 만큼 빠져서는 곤란하다. 여운형처럼 개조파 입장에 섰다가 임정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다만 여운형은 야구 경기 구경하다 체포되어 국내에 압송된 후 국내 활동을 하였고, 김규식은 체포되지 않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다시 들어와 활동했다는 점에서 갈리게 되었다. 해방 후 여운형과 좌우 합작을 하였고, 여운형의 죽음을 매우 슬퍼했다 한다. * [[장건상]]: 상하이 임시 정부에서 활동했으나 귀국 후, 임정을 탈퇴하고 민주주의 민족 전선에 가담한 이래 여운형과 정치 활동을 같이 했다. 사로당 창당과 근민당 창당에 참여하고 근로 인민당 부위원장으로 활동하다 여운형 사후 근민당 총수가 됐다. 남북 협상 때는 김구, 김규식에게 수반급이니 북행은 위험하다며 만류하기도 했다. 남북 협상 중 우리가 근로 인민당 활동을 하는 것은 다 같이 행복하게 잘살기 위해서 하는 것이지 폭력 노선을 추종하려는 게 아니라며 항의했다가 연금되기도 했다. [[김두봉]], [[박헌영]], [[홍명희]]와의 인연으로 겨우 풀려나 귀환했다. * [[조동호]], 이만규: 여운형과 조동호는 중국으로 유학가기 전에 개성에 있는 이만규의 집에 머물렀는데 이때 셋은 서로간의 우애를 돈독히 하였고 평생 친구가 되었다. 이만규는 국어 학자이자 교육자로 여운형, 조동호와의 만남을 도원 3결에 빗대었으며 <<여운형 선생 투쟁사>>를 저술하기도 했고, 국내에서 국어와 고전 역사 부분 연구 활동을 주로 하였고 해방 후 근로 인민당 조직 위원장이 되기도 했다. 한편 조동호는 여운형과 평생을 가까이 한 동지로 금릉 대학(다만 영문학과가 아닌 중문학과), 상해 임시 정부,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 민주주의 민족 전선, 근로 인민당의 루트를 거쳤다. 여운형 암살 이후로 이만규는 북으로 건너가 1급 사회 과학 고전 연구사가 되었고, 조동호는 정계를 은퇴하고 낙향하였다. * [[조봉암]]: 여운형이 상해 협화 서국에서 일할 적에 그의 집에 찾아가서 조선 공산당이 제 3 인터내셔널의 승인을 얻어야하니 모스크바로 가는 여권을 교부해 달라 부탁했던 적 있고, 이것이 1차 조선 공산당 사건과 맞물려 물의를 일으켜 여운형이 국내에 압송된 계기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그가 출소 했을 때 여운형은 서대문 형무소로 마중 나갔고, 조봉암은 남로당, 민주주의 민족전선에서 활동하고 좌우 합작 운동을 지지하는 등 여운형과 밀접하게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박헌영 비판 서한이 우익 측의 선전용으로 사용되자 노선을 온건하게 바꾸어 남한 단독 선거에 참여하게 되었다. 사실상 여운형의 정치적 후계자. * [[박헌영]]: 여운형과 더불어 고려 공산당 멤버였고, 국내 공산주의 활동을 하면서 여운형 집에 들러 여운형이 준 은수저를 받아가고 [[1946년]] 열린 여운형의 환갑잔치에도 참석하는 등 여운형과 친분이 있었으나 조선공산당은 좌우가 모두 참여한 선거를 통해 지지만큼의 지분을 얻고 싶어했지만 미군정의 좌우합작은 공산당 고립화 전략이었기 때문에 여운형과 노선을 달리하여 좌우 합작에 반대하고 라이벌이 되었다. 강준식의 소설에서는 좌우 합작 운동을 하는 여운형을 납치해 좌우 합작을 포기할 것을 종용하나 여운형이 말을 듣지 않고 서로 대판 싸우고, 부하들을 시켜 나무에 거꾸로 매달아버리는 장면도 나온다. * 고경흠: 조선에서 사회주의 활동을 하였고 여운형이 1940년도에 일본을 방문했을 적에 비서 역할을 했다. 해방 후 박헌영 중심의 3당 합당 개편과 남로당을 비판하고 근로 인민당에 참여하였으며 여운형의 경호원, 최측근 역할을 하였다. 여운형이 한지근에게 암살당했을 때 바로 옆에 타고 있었다. 월북하여 고위 정치인이 되었으나 종파 사건 때 숙청되었다. * 이기형: 해방 후 여운형을 찾아가 그와 가까이 지냈다. 타칭 여운형의 비서. 하지만 시인은 비서가 아니라 그저 좋아서 따라다녔을 뿐이라고 말씀하신다. 여운형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여운형 평전을 저술하였고, 여운형 생가 터 비문을 작성하기도 하였다. 92세인 2005년 열 번째 시집인 '절정의 노래'를 썼으며, 2013년 6월 13일 9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이란: 여운형의 제자라고 하는데, 맞긴 맞는데 정확하게는 아버지 이임수 씨가 여운형과 친분이 있었다. 이임수는 관동 의원을 개업하는 한편, [[텅스텐]] 광산을 운영하면서 여운형과 여운형을 따르는 재일 조선인 유학생들을 금전적으로 지원해줬다고 한다. 여운형은 관동 의원 2층에서 이란의 동창생들에게 독립 정신을 고취하는 강연을 하였는데, 이 때문에 이란은 동창생들과 함께 일경에 붙잡혀서 3년간 인천 소년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 손치웅: 학생 시절에 "미국의 소리" 단파 방송을 청취하여 일본의 패전 상황을 여운형에게 보고하였고, 여운형의 밀서를 들고 평양에 가서 조만식에게 전달해주기도 하였다. 이만규의 《여운형투쟁사》에서 손웅이라고 표기되어있다. [[http://blog.naver.com/imongyang/40035718782|자세한 인터뷰 내용]] * [[여운홍]]: 여운형의 친동생. 미국유학 후 [[김규식]]을 따라 파리 강화 회의에 참가했으나 실패, 구미 위원부에서 활동하다가 귀국하여 임정에 참여한다. 그뒤 형이 체포되어 송환되자 귀국, 장사와 식당 지배인 등으로 활동하다가 해방을 맞는다. 하지만 해방 직전 형과 달리 친일 행위를 했다. 그뒤 건국 동맹, 건준에 참여하고 미군정 진주 때는 건준과 여운형의 대리인으로 하지 사령관을 면담, 거절당했다. 그 뒤 조봉암이 조선 공산당을 탈당하여 박헌영의 영향에 치명타를 줄때, 그는 근로 인민당을 탈당하여 여운형의 영향력에 타격을 주기도 했다. 후에 자유당에 입당했다가 민주공화당으로 이동했다. * [[김일성]]: 의외로 사이가 좋았다. 여운형은 좌우합작운동을 벌이며 북한의 지도자들과도 합작해야 된다고 생각해 5번이나 38선을 넘나들며 김일성을 만났는데 이때의 김일성은 중도세력까지 끌어들이는 통일전선으로 남한 좌익의 세를 불려야 한다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박헌영]]보다는 여운형의 입장을 지지해주는 경우가 많았다.[* 다만 모든 부분에서 둘의 의견이 일치한건 아니었다. 여운형은 북한만의 토지개혁이 남북의 이질화를 심화시켜 분단으로 가는 길이 될 수도 있다고 김일성을 만류하기도 했다.] 실제로 여운형이 자식들 중 일부를 김일성에게 맡겼다는 사실만 봐도 둘의 사이가 좋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운형의 자식들은 북한에서 고위 관료를 지냈으며 김일성은 여운형 사후에도 여운형에 대해서 줄곧 높게 평가했다. 물론 여운형은 [[1947년]]에 암살당했기 때문에 [[6.25 전쟁|이후의]] [[주체사상|김일성의 행보]]를 보지 못했다는 것은 감안해야 한다. * [[김구]]: 현재는 둘의 지지자가 어느정도 겹치는 것과 달리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다. 찬탁과 반탁에서 입장이 극명하게 갈린 것도 있었지만 그 전에도 김구는 여운형을 무지 싫어했는데 그 이유는 바로 임정 법통 문제 때문. 여운형은 한 때 임시정부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주로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했던만큼 임시정부에 법통이 있다는 주장에 대해 회의적이었고 많은 독립운동 단체 중 하나로만 보았다. 김구는 그가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한 것에 대해 임시정부에 대한 도전이라 생각하고 귀국 후 여운형이 [[경교장]]으로 자신을 만나러 왔을 때 아예 만나주지도 않고 무시했을 정도다. * [[김원봉]]: 해방 이전부터 김원봉이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할 수 있도록 주선해 주는 등 인연이 있었으며 해방 이후에는 여운형을 존경해 그의 정치적 노선을 줄곧 따랐고 테러 위협을 받는 여운형의 경호에 나서기도 했다. * [[손기정]] * [[김무정]] * [[강원용]] * [[김성수(1891)|김성수]] * [[김용기(1909)|김용기]] * [[송진우(독립운동가)|송진우]] * [[안재홍]] * [[이광수(소설가)|이광수]] * [[장택상]] * [[장건상]] * [[장덕수]]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