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여소야대 (문단 편집) ====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 ~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 ==== 집권당인 [[대한국민당]]은 [[신익희]]가 이끄는 [[민주국민당]]에게 제1당 자리를 내어주고, 친[[이승만]]계 범여권 정당의 의석을 모두 합쳐도 총 210석 중 57석에 그치는 여소야대 정국이 벌어졌다. 당시 [[제헌헌법|헌법]]에 의하면 대통령을 국회에서 [[간접 선거]]로 선출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는데, 1952년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의 패배가 예상되자, 부산정치파동을 일으켜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을 단행하였다. 이를 [[발췌 개헌]]이라고 한다.[* 사실 대통령 중심제에서는 이게([[직선제]]) 맞는 것이긴 한데, 문제는 개헌 과정에서의 위헌성과 비합법성, 폭력성이다.] 이후에는 1950년대에 [[자유당]]이 관권선거를 하면서까지 여소야대의 출현을 막았으며 그로 인해서 1954년 총선과 1958년 총선에서는 자유당이 과반수를 여유롭게 확보할 수가 있었다. 그 이후 제2공화국은 의원내각제를 채택하여 여대야소가 당연한 것이 되었고, 대통령제로 회귀한 1960년대에는 역시 관권선거를 동원해서 [[민주공화당]]이 과반수를 확보할 수 있게 했고 그 결과로 1963년 총선, 1967년 총선, 1971년 총선에서는 민주공화당이 여유롭게 과반 이상을 확보했다. 그 뒤에 1970년대와 80년대 중반에는 [[유신정우회]]가 국회의원 정수의 1/3을 배정하는 식으로 여소야대의 출연을 막았고, 1980년대 5공화국 때는 지역구 1당에게 [[전국구]] 의석의 2/3 배정이라는 선거법을 도입하여 여소야대 정국의 출현을 막게 만들어서 1973년 총선과 1978년 총선, 1981년 총선, 1985년 총선에서 민주공화당과 [[민주정의당]]의 득표율이 30%대로 그리 높지 않았던데다가 [[지역구]]에서 과반을 확보하지 못했음에도 전체 의석 과반을 여유있게 확보할 수 있게 만들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