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여불위 (문단 편집) === 몰락과 최후 === [[노애]]는 조태후와의 간통 끝에 아이를 둘이나 얻었는데, 그는 자신이 낳은 자식들을 진나라의 왕으로 세우려는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어른이 된 진시황에게 이러한 사실이 곧 발각되었는데, 노애는 사병들을 동원하여 수도 함양 한복판에서 반란을 일으켜 항거하였다. 그러나 진시황은 이에 침착히 대응하여 곧 반란은 어렵지 않게 진압되었다. 진시황은 노애를 비롯한 그의 삼족을 죽였으며, 노애의 가신들 또한 가산을 몰수당하고 [[촉#s-4]] 땅으로 추방했다. 조태후가 노애와 간통하여 낳았던 아이들도 모두 살해당했다. 분노가 극에 달한 진시황은 자신의 친어머니였던 조태후마저 진나라의 [[구도#s-5|구도(舊都)]]였던 [[옹#s-2]]에 유폐시켜버렸다.[* 그러나 후에 신하들이 뜯어말린 덕분에 어머니에게 더 이상 해를 가하지는 않았고, 다시 함양의 궁으로 돌아오도록 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여불위는 이 반란에 직접적으로 관련되진 않았지만[* 여불위는 그냥 [[색#s-2]]에 빠져버린 조태후가 자신한테 엉겨붙는 게 귀찮아서 적당히 밤일이나 즐기며 살라고 노애를 소개시켜줬을 뿐이지 '''반란 일으키라고 소개해준건 '절대' 아니었다.'''] 애초에 노애를 조태후에게 소개해준게 자신이었으며 여불위의 권력 자체를 불편하게 여긴 영정은 이 명분을 절대 헛되게 버릴 생각이 없었다. 결국 가짜 환관을 궁 안에 넣었다는 빌미로 영정은 그를 파면 - 사형 순으로 집행하고자 했으나 여불위를 따르는 사람들 또한 많았기에 그들의 항소를 버티지 못하고 여불위를 상국에서 파면시킨 후, 문신후로 봉할 당시 하사받은 하남으로 쫓아내어 사실상 함양의 중앙정부와 단절시키는데서 처벌을 끝냈다. 다만 중앙 정부에서 축출되었다곤 해도 이때까지 여불위의 명성과 인맥이 어디간 건 아닌지라 그 후 약 1년 정도는 각국의 제후들이 빈객과 사신을 보내 여불위에게 인사를 하러 왔고 이 소식은 당연하게도 영정의 귀에도 들어갔다. 그 당시엔 여불위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힘을 무시할 정도로 강력하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여불위를 하남으로 보내는 데서 그쳐야 했으나 그동안 중앙정부를 사실상 장악하는데 성공한 영정은 이 건을 다시 책잡아 그와 그의 가솔들에게 [[촉#s-4]] 지방으로 파견가라고 명령했다. 여불위는 영정이 보낸 이 편지[* 이 때 편지 내용이 그 당시 시대상으론 매우 모욕적이었는데, 영정 본인의 아버지를 왕위에 올리는 것 빼곤 아무 것도 못한 주제에 니가 뭔데 나에게 '상보'라 불리냐며 비난했다. 말그대로 왕을 세운 것만으로도 큰 공이고, 영정의 킹메이커가 되어준 것까지 고려하면 노애 건 하나때문에 책잡혀 이렇게 밀려버린 여불위 입장에선 울화가 터질 수준이었을 것이다. 물론 여불위와 노애 사건은 여불위가 분통 좀 터진다고 항의할 수 있는 수준의 사건이 아니었다는 게 문제.]를 받고 재기가 불가능하다는걸 깨달으며 독약을 마시고 자살했다. 여불위가 자살하기 전 평소 그를 충직하게 따르던 [[이사(전국시대)|이사]]가 와서 그에게 여러 번 조정으로 돌아와 달라고 부탁했지만 거절했다고 하며, 그는 자신은 죽어서 왕이 되고 싶으니 땅을 왕관삼아 머리가 아래로 향하도록 수직으로 몸을 세워 몸의 반만 묻어달라고 유언했다고 한다. 훗날 [[무제(전한)|한무제]]는 지금의 [[윈난 성]] 지역(운남성)을 정복하면서, 여불위가 추방된 이후에 촉 지역에 모여 살던 여씨들을 이 지역으로 이주시켰고, 현 이름에 여불위 이름까지 붙여주기도 하였다.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운남 태수였던 [[여개]]도 이런 여씨 일족 중의 한 명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