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여불위 (문단 편집) === 왕을 만들다 === [[효문왕|안국군(安國君)]]의 [[정실부인]]이었던 화양부인(華陽夫人)이 자식을 낳지 못했기에, 안국군의 아들들은 모두 첩들에게서 얻은 [[서자]]였다. 이때문에 안국군은 자신이 왕위에 오른 후 차기 태자가 될 이를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여불위는 안국군의 정실부인이었던 화양부인을 지지자로 끌어들이라고 이인에게 조언했다. 이를 따른 이인은 화양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500금에[* 《사기》 <여불위 열전>에 기록된 바로는 五百金] 달하는 많은 재물을 그녀의 언니에게 보내어 비위를 맞추고, 화양부인의 고향인 [[초(춘추전국시대)|초나라]]를 위하는 것처럼 연극까지 했다.[* 여불위의 '''사람 보는 비범한 능력'''을 알 수 있는 부분으로, 보통 사람이 사람을 판단할 때에는 그 사람 개인의 자질만을 보고 판단하지만, 여불위는 '''그 사람의 자질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이 처한 환경이 어떤 이득을 창출해낼지 간파'''하여 이인을 지목한 것이었다. 즉, 이인이 아닌 안국군의 다른 아들을 골라서 진왕으로 만들어도 상관이 없었던 것인데 '''저런 볼모로 잡힌 상황까지 이용해서 이인을 왕으로 만든 뒤에 자신의 입지까지 도모한 것이다.'''] 화양부인은 비록 슬하에 자식은 없었으나, 태자인 안국군의 정실부인이었기 때문에 상당히 강력한 발언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언젠가 안국군의 서자가 왕이 되면 모든 권력을 잃고 말 것을 두려워 했다. 그 와중에 자신을 지극히 위해주는 이인은 화양부인에게 유일한 희망과 같았다. 화양부인은 곧 이인을 자신의 양자로 삼아 보호해주었고, '''“초나라의 자식”'''이라는 뜻의 '''자초(子楚)'''라는 이름까지 지어 주었다.[* 참고로 화양부인은 후일 자초가 왕이 된 뒤에도 또 그 자초가 죽은 후 자초의 아들인 영정, 즉 진시황이 즉위했을때도 살아있었는데 진시황은 어머니와 꽤나 사이가 안 좋아서 할머니 격인 화양부인과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기원전 257년, 진나라 장수 [[왕흘]]이 조나라의 수도 [[한단]]을 공격해 오자 [[장평대전]]때도 참아줬던 [[조효성왕|조 효성왕]]은 인내심이 바닥났던지 자초를 살해하고자 병졸들을 보냈다. 여불위는 이 병사들에게 무려 황금 600근을[* 한나라 때의 1근은 233g인데, 전국시대에도 같았다면 황금 600근은 오늘날의 kg단위로 환산하면 황금 139.8kg에 달한다. 참고로 지금처럼 1근이 600그램이 된 건 송나라 때다.][* 2011년 4월의 금 시세로 환산해서 약 '''29,585,203,200(295억 8520만)원'''에 달하는 가치가 있는 양이었다. 이 정도의 뇌물이면 영이인을 죽이러 온 조나라 병사가 몇 명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전원을 매수하고도 남는 금액이다. - 출처:《전쟁의 역사 3》, 남문희 저, 휴머니스트] 뇌물로 뿌려 자초를 조나라에서 탈출시키고 그의 아내 [[조희(전국시대)|조희]]와 아들 [[진시황제|정]]은 잠적시켰다. 효성왕은 자초의 처자식이라도 죽이려고 열심히 찾았지만 여불위가 잘 숨겨줘서 살아남았다고 한다. 이후에도 조희와 영정은 조나라에서 지냈는데, 기원전 251년, [[소양왕]]이 죽고 태자였던 [[효문왕]]이 즉위하면서 자초가 태자의 지위에 오르자 진나라로 왔다. 여담으로 왕흘의 군대는 [[염파]]가 격파했다. 자초의 할아버지인 [[소양왕]]은 무려 50년이나 왕위에 있던 중에 죽었다. 그 뒤를 이어 태자 안국군이 즉위하여 효문왕이 되었으나, 그 역시 이미 상당히 고령이었던 까닭에 왕위에 오른지 얼마 안 되어 급사했다. 결국 효문왕의 태자였던 자초가 즉위하여 [[장양왕]]이 되었다.[* 나중에 장양왕의 아들인 [[진시황]]은 장양왕을 [[태상황]]으로 추증했는데, 그의 휘인 '''자초(子楚)'''가 [[초나라]]의 '''초(楚)'''와 같다는 이유로 [[피휘]]하기 위해서 초나라를 뜻이 같은 한자로 [[형나라|'''형(荊)'''나라]]로 바꿔 부르게 했다. 그래서 《[[사기(역사책)|사기]]》에는 초나라가 형나라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고, 초나라의 별칭으로 형나라를 쓰기도 한다.] 이리하여 여불위는 서자 출신인 데다가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의하여 조나라에 볼모로 보내졌던 떨거지 왕족[* 오죽했으면 [[장평대전]]에서 [[조괄]]이 큰 실수를 저질러 [[백기(전국시대)|백기]]한테 크게 당하고 수많은 병사가 생매장당했을 때도 조 효성왕은 영이인을 화풀이로 삼아 죽일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여 죽이지 않았다.]을 당시 중원 제일의 초강대국이었던 진나라의 왕으로 만드는 가히 기적적인 활약을 하였다. 장양왕은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웠던 여불위에게 하남과 남양 땅의 10만 호를 하사하여 문신후에 봉했을 뿐 아니라, 진나라의 승상으로 임명함으로써 보답하였다. 승상의 직위에 오른 여불위는 덕분에 진나라 정계의 실세로 떠오르게 되었으며, 한 순간에 중원의 정세를 좌지우지할만한 위치의 [[고관대작]]으로 거듭났다. 요약하면 당시 약소국이었던 [[위(전국시대)|위나라]]의 상인으로 태어나서 왕이 되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던 왕족의 일원을 진왕으로 옹립했고 그에 대한 보답으로 재상이 되어 막대한 명예와 부를 거머쥐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여불위는 비록 상인 출신이었으나 비범한 통찰력과 수완을 지닌 인물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