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엘리자벳 (문단 편집) === 실제 역사와는 다른 점 === * 1막 넘버 '결혼의 정거장들(Stationen einer Ehe)'에서 프란츠 요제프가 '당신의 아름다움이 도움이 된다'면서 함께 헝가리로 갈 것을 요청하고, 엘리자벳이 두 아이와 함께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실제로는 정반대였다. 당시 엘리자벳은 헝가리에 큰 관심과 애정이 있었고 요제프에게 애원해서 두 딸과 함께 여행을 가게 해달라고 간청했고 요제프가 소피 대공비를 설득해 허락했다. 하지만 두 딸 모두 고열과 설사에 시달렸고 큰 딸이었던 소피는 결국 2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딸 소피가 죽은 장소도 뮤지컬에서는 데브레첸(Debrezin)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부더(부다)[* [[부다페스트|부더가 페슈트와 합쳐진 건]] 프란츠 요제츠와 엘리자벳이 헝가리의 사도왕과 사도왕비로 즉위했을 시기다.]에서 죽었다. 참고로 데브레첸은 헝가리에서 혁명이 일어나던 시기에 수도 역할을 했던 도시다. * 2막 넘버 '질문들은 던져졌다- Reprise'에서 루케니가 제국을 [[침몰]]하는 배에 비유하며 엘리자벳의 주변인물들이 비참한 꼴이 되는 걸 나열해 주는데 그 중 엘리자벳의 동생이자 나폴리의 여왕이었던 '마리아 폰 비텔스바흐'가 미쳐버렸다고 언급하는데 실제로는 좀 다르다. 마리아는 당시 [[양시칠리아 왕국]]의 왕위계승자였던 [[프란체스코 2세]]와 결혼해 왕비가 되었으나 곧바로 [[가리발디]]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현실에서는 프란츠 요제프의 [[6촌]] 형이기도 하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어머니 마리아 테레사와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아버지 프란츠 카를 대공이 친사촌간이다.]가 진행하던 [[이탈리아 통일|이탈리아 통일 전쟁]]을 맞이하게 되었다. 가리발디가 수도 나폴리를 함락시키자 국왕 부부는 가에타(Gaeta) 요새로 달아나 항전했고 마리아 역시 병사들을 독려하며 버텼지만 결국 함락되어 로마로 도망갔고 로마마저 함락되자, 각국을 돌아다니며 왕국의 재건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그녀의 행보가 과격하고 열성적이었으나, 미쳤다고 판단되는 행보는 확인이 어려우며 오히려 '전사 여왕'으로 불렸다. 참고로 이 분 당시의 소문에 따르면 [[제1 차 세계대전]]이 벌어지고 이탈리아가 독일 및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버리고 협상국 측에 서자 통일 이탈리아를 분열시키고 나폴리를 다시 세우려고 발벗고 나서 첩보와 [[사보타주]]를 행했다고 한다. 정말로 미쳐버렸다고 기록된 이는 [[나폴레옹 3세]]에 의해 억지로 멕시코의 황제로 추대되었다가 혁명을 맞아 처형된 [[막시밀리아노 1세]]의 아내 '[[멕시코의 카를로타|마리 샤를로트 드 벨지크]](벨기에의 마리 샤를로트)'였다. 남편이 프랑스 군마저 철수한 멕시코에서 홀로 위태롭게 왕좌를 지키자 유럽으로 건너와 도움을 요청했으나 호응을 얻지 못했고, 결국 남편에 대한 불안과 걱정으로 인해 정신병에 걸려 발작을 일으키자 이탈리아의 미라마르 성에 유폐되었고, 막시밀리아노가 처형당한 후에는 벨기에의 마이즈 성으로 강제로 옮겨져 거의 평생을 유폐당한 채로 살았다. * 엘리자벳의 자녀들 중 이름이 언급되는 건 일찍 죽은 소피와 [[루돌프 프란츠 카를 요제프|황태자 루돌프]] 뿐이다. 넘버 '결혼의 정거장'에서 또 딸을 낳았다는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이 둘째 딸이 '기젤라 루이제 마리(Gisela Louise Marie)'이고, 아예 언급조차 안되지만 헝가리에서 태어나 엘리자벳의 사랑을 듬뿍 받은 막내 딸 '마리 발레리(Marie Valerie)'가 있다.[* 엘리자벳의 편애가 너무 심해서 기젤라와 루돌프가 발레리를 질투했다고 한다. 심지어 마리 발레리의 결혼에 대해서도 상당히 관대해서 왕가끼리 결혼하던 전례 등을 모두 무시하고 '설령 발레리가 굴뚝 청소부를 데려온다 해도 허락할 것'이라고 선언하기까지 했다.] 참고로 마리 발레리는 어머니의 사랑을 너무 받다보니 때로는 그 사랑과 관심을 부담스러워 했다고 한다. * 1막 넘버 '신이시여 지키소서 우리 젊은 황제(Jedem gibt er das Seine)'에서 교회가 학교를 감독하게 하는 걸 허가해 달라는 라우셔 추기경의 청원은 윤허하면서, 자유를 외친 이의 처형을 면해달라고 요청하는 한 어머니의 청원은 불허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프란츠 요제프가 어머니와 궁정인들의 눈치 때문에 자기 뜻을 펼치지 못한다는 것을 드러내는 장면이긴 하나, 실제로는 소피 대공비 뿐만이 아니라 프란츠 요제프 자신도 헝가리의 혁명에 동참한 이들을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당장에 프란츠 요제프가 즉위할 당시 이른바 [[1848년 혁명]]이라 불릴 정도로 전 유럽 곳곳에서 혁명이 발발했는데 오스트리아 제국의 경우는 수도 비엔나 뿐만이 아니라 헝가리에서도 제압하기 어려울 만큼의 큰 봉기가 일어났고 그마저도 자력이 아닌 혁명이 발생하지 않은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 진압할 수 있었다.[* 그러나 프란츠 요제프는 [[크림 전쟁]] 막바지에 국익을 위해 오스만 투르크의 편을 들면서 참전의사를 밝힘으로서 헝가리의 혁명을 진압해 자신을 도와준 [[니콜라이 1세]]와 그 뒤를 이은 [[알렉산드르 2세]]의 뒷통수를 거하게 쳐버리는 일을 벌이고 만다.] 이 때 러시아 군의 개입이 아니었으면 그야말로 제국이 공중분해 되었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에 당연히 엄격한 탄압이 가해졌다. 뮤지컬에서는 신절대주의에 가려진 프란츠 요제프의 부드럽고 상냥한 모습을 묘사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이나, 당시의 시대적 정황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여담으로 헝가리 독립운동가가 프란츠 요제프를 암살하려 했다가 붙잡혀 처형되었고, 아들의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선처를 빌던 그 어머니가 황제를 저주하여 프란츠 요제프는 평생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신을 앞서 떠나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는 [[도시전설]] 같은 이야기가 있는데[*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도 한 번 방영되었다.] 이 일화를 암시하여 넣은 장면일지도. * 4연 초반부에 [[프란츠 요제프 1세|황제]]가 업무를 보는 장면이 나올 때 헝가리 독립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때 나오는 오스트리아 지도 '''현재 오스트리아+헝가리'''이다! 명백한 고증오류.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은 [[세계 1차 대전]]이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문서를 봐도 알 수 있듯이 현재의 오스트리아보다 훨씬 컸고 헝가리도 훨씬 컸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세계 1차 대전 이후의 지도를 그려놓은 것. 그 외의 역사적 고증은 대체적으로 괜찮다. 프란츠 요제프가 너무 말쑥하게 묘사되었다는 것 정도가 흠이랄까..[*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초상화를 보면 알겠지만 수염이 매력적인 대신에 [[대머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