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제키엘 (문단 편집) === [[김회권]] 교수의 강해 === 김회권 교수가 심도 있게 강해한 바 있다. 김회권 교수의 대표작인 <김회권 목사의 청년 설교 1>을 보면 1장, 37장, 47장을 강해했다. 그에 따르면, 1장에서 에스겔 앞에 나타난 [[야훼|하나님]]의 메시지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난 살아 있다'라고. 예루살렘성이 함락당하고 이스라엘 민족이 포로로 잡혀가자 사람들은 이제 이스라엘 민족이 섬기던 여호와도 죽었다고 생각을 했는데, 그렇지 않고 살아 있으며 영원히 다스리고 있다는 것. 김회권은 이를 하나님이 이스라엘만을 다스리는 신이 아니라 온 세상을 다스리는 절대적인 주권자라는 뜻으로 해석했다. 그러면서 독자들(청년층을 염두에 두고 썼다)을 향해 "하늘이 열리는"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깨닫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을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본문에 의하면 에스겔은 30살의 나이에 하늘이 열리는 경험을 합니다. (중략) 하늘이 열리는 경험을 한 장소와 무대를 주목해 보십시오. "그발강 가", "사로잡힌 자 중" 입니다. "사로잡힌 자"라는 말은 당시의 역사를 볼 때 전문 용어에 가까운 표현으로, 주전 597년에 바벨론으로 끌려가 포로 수용소 같은 집단 거주지에 살던 유다의 포로들을 통칭하는 용어입니다. 에스겔은 사로잡힌 자의 공동체 일원이었습니다. 부자유한 사람이었다는 뜻입니다. (중략) 그런 에스겔에서 "하늘이 열리는" 사건은 자유와 해방 역사의 시작이었습니다. (중략) >에스겔이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하늘 열림, 곧 새로운 역사 해석 시점을 획득한 장소는 어디입니까? 그발강 가입니다. 그발강 가는 유다 포로들의 집단 거주지입니다. 그 위치는 아마도 텔아비브(에스겔 3장 15절)이었을 것입니다. 바벨론 역사 기록에 의하면, 유다의 포로들은 유프라테스강의 지류 정도였을 그발강의 운하 공사 현장에 투입된 것으로 보입니다. (중략) >에스겔이 거주하던 그발강 가에서 이처럼 참혹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그 그발강 가에서, 그토록 참혹한 일들이 벌어지는 한가운데 멸망당한 조국의 비애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던 제사장 에스겔에게 하늘이 열린 것입니다. (중략) 공동체의 절망은 그 구성원의 개인적 절망 안에서 극에 달합니다. 에스겔은 그런 절망을 경험한 것입니다. '''하지만 에스겔은 "하늘의 열림"을 경험함으로써 땅의 절망을 초극했습니다.''' 그는 땅에서 잃고 하늘에서 얻습니다. 이것을 어설픈 형이상학으로 착각하면 안 됩니다. 그는 땅의 절망을 포섭하고 용해시켜 버릴 만큼 강력한 희망과 신앙에 눈을 뜸으로써, 땅의 흑암을 돌파한 자가 된 것입니다. >(중략) 청년 여러분, 지금 절망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습니까? 이 절망을 돌파하는 신앙을 갖는 것이, 세속적으로 출세하고 성공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중략) 지금 한국은 신자유주의라는 무한 경쟁의 살기에 휩싸여 있습니다. 신자유주의는 국제 자본의 운동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세계를 단일 시장으로 만들어 기업들의 자유 경쟁을 부추기는, 거의 무한 경쟁의 경제 논리입니다. 신자유주의는 인간 공동체의 안녕과 복지, 배려와 절제를 도외시한 채 달려가는, 인간의 경쟁심과 탐욕을 무제한으로 긍정하는 이데올로기입니다. 한국 사회는 지금 거대한 압박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폭발 직전의 용암처럼 절망적 탄식이 끓고 있습니다. (중략) 답답한 그발강 가의 포로 수용소 같은 전방위적 스트레스가 폭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략) 분명한 것은, 우리나라 청년들도 이미 그발강 가와 같은 현실과 마주해 있다는 것입니다. (중략) 이런 현실에 정말로 필요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무한히 강한 자가 되는 것이겠습니까, 아니면 패자가 되었을 때 자신의 인생 설계대로 진행되지 않은 현실에도 굴하지 않고 재기할 수 있는 복원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겠습니까? 후자가 더욱 절실하게 필요한 것입니다. >에스겔에게 하늘이 열리는 경험이 알찬 것은, 자신의 인생을 파산, 상실, 절망의 코드로만 읽지 않고, 창조적 해체, 하나님의 세계 통치에 대한 새로운 눈뜸, 자신의 새로운 사명 발견의 관점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중략) 하늘이 열리면서 하나님의 불전차 보좌를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망해도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보좌에는 이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이스라엘에게도 미래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중략) >'''에스겔이 발견한 새 세계는 절대적인 부가 가치를 창조하는 행복의 근원입니다. 만인을 동시에 기쁘게 하고 만인에게 경쟁 없이 하나님의 무한하고 부요한 자원을 누리도록 하는 복음의 세계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아무리 써도 다함이 없는 자원이요, 다툴 필요가 없는 영토입니다.''' 희소성의 원칙을 완전히 극복하는 엄청난 대생명의 자원, 이것이 에스겔이 발견한 뉴 프론티어입니다. 하나님의 불전차 보좌에서 바라본 유다의 역사 안에는 희망과 소생의 여지가 남겨져 있었습니다. (중략) >에스겔을 사로잡은 하늘의 불전차 보좌는 폭풍과 화염 속에서 종횡무진으로 움직입니다. (중략) 에스겔보다 먼저 온 이스라엘 사람으로, 폭풍과 큰 구름을 동반하면서 강림하신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모세와 엘리야입니다. 그들은 폭풍의 구름 전차를 타신 하나님, 세계 속에서 종횡무진하시는 하나님,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했지만 이스라엘 민족의 운명에 매이지 않는 절대적으로 자유로우신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사실, 고대 근동 문명에서 신학은 정치학의 부속 학문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한 나라가 망하면 그 나라가 섬기던 신도 망하는 것으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앗수르가 망하면 앗수르의 신도 더 이상 기억되지 않습니다. 바벨론이 망하면 바벨론 신도 그날로 시효가 끝납니다. 그래서 주변 나라들은 유다가 망하자 야웨 하나님도 소멸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정반대의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유다가 멸망하자마자 하나님은 더욱 찬란한 불 전차 보좌를 타고 세계 속에 종횡무진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역사에 매이는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중략) 에스겔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유다의 운명과는 전혀 다른 궤적을 따라 움직이는 하나님이심을 발견한 것입니다. 비록 유다 왕의 보좌가 텅 비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보좌에는 하나님이 좌정하고 계심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보좌 위에 "앉아 계신다"라는 말은 정상적으로 통치 행위를 수행하고 계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중략) 따라서 하나님이 보좌에 앉아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안심시킵니다. 우주적인 평안을 보증하는 말입니다. 보좌 위에 하나님이 앉아 계신 것을 본 에스겔은 우주적인 평화를 맛봅니다.(중략) >에스겔은 확실히 유다 왕위와 상관없이, 네 생물들의 그 신속한 순종을 담보로 전 세계를 누비고 다니는 하나님의 불 전차를 보았습니다. 거룩한 전차요 신속하게 이동하는 전차를 본 것입니다. 유다라는 장소에 국한되지 않고 전 세계를 종횡무진하시는 하나님의 보좌를 보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좌를 보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왕으로 여전히 세계를 다스리고 계신 것을 보았다는 말입니다. (중략)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것을 믿을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구원이요 복입니다.[* 김회권, 김회권 목사의 청년 설교 1, 복 있는 사람, 2009, pp.57-91] 37장의 경우 위에서는 뒷부분, 그러니까 남북 이스라엘이 통일되는 부분에 초점을 맞춘 반면, 김회권은 앞부분, 그러니까 골짜기에 잔뜩 쌓인 마른 뼈들이 부활하는 부분에 초점을 맞춰서, 이를 [[야훼|하나님]]의 능력을 통해 암울한 절망 가운데 빠져 있던 사람들이 생명력을 회복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비록 지금은 이스라엘이 죽음의 상태에 있지만(오랜 포로 생활로 절망하고 무덤과 같은 상황에 있는 백성들), 여호와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영적으로 소생할 것입니다. 소생된 이스라엘과 유다는 하나님의 손안에서 하나가 될 것입니다(에스겔 37장). 에스겔 37장 1~14절은 마른 뼈들의 절망 언어와 하나님의 부활 언어를 생생하게 대조시킵니다. 대언자를 통해 마른 뼈들에게 들려진 하나님의 말씀은 창조의 에너지 그 자체입니다. 무덤 속의 부활은 분열된 이스라엘과 유다의 연합을 의미하며 이상적인 다윗 왕의 다스림 아래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두 막대기로 대표되는 이스라엘과 유다는 하나님의 손안에서 하나가 될 것입니다. 에스겔의 새 언약은 통일과 연합의 언약이자 하나님의 주도하에 갱신되는 언약입니다(에스겔 37장 15~28절). 마른 뼈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마른 골짜기에서 부활할 것이며 무덤에서 뛰쳐나올 것입니다. 그리하여 다윗왕과 같은 이상왕의 주도 아래, 열방 중에 흩어진 마른 뼈들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군대"로 부활할 것입니다.(중략) >이처럼 '''에스겔 36장은 이스라엘의 영적 갱신과 민족적 부활을 예언하는 보다 큰 예언 단락의 중심입니다.''' 본문에 따르면, 아골 골짜기의 마른 뼈들을 하나님의 군대로 부활시키는 데 결정적인 세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 하나님의 말씀, 말씀의 대언자입니다. (중략) >에스겔에게 하나님 백성의 부활은 다음의 네 가지 요소를 포함하는 미래를 의미합니다. '''첫째, 유다와 이스라엘 포로들의 고토 복귀입니다. 둘째,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의 통일과 연합입니다. 셋째, 고토에서 율법을 준수함으로써 번영과 안전 확보와 평화 및 민족적 화해의 경험입니다. 넷째, 다윗왕과 같은 이상왕에 의한 계약 공동체성의 회복이었습니다.''' (중략) >요셉 지파의 이름을 쓴 막대기와 유다 지파의 이름을 쓴 막대기의 결합은 두 지파의 정치적, 인적 통합을 의미합니다. 야웨 하나님의 손안에서 두 막대기로 대표되는 왕국이 합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안에서 통일된다는 말은 또 다른 의미에서 이상왕 다윗의 영도력 아래 남북 왕국이 통일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중략) 이스라엘 민족의 미래는 다윗 왕의 다스림 아래 전례 없는 번영과 평화를 누리는 시대가 될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중략) 에스겔이 고취한 미래 비전에 의하면, 가나안 고토로 복귀한 후에 분열과 적대심으로 찢겨졌던 이스라엘과 유다가 하나님의 손안에서, 그리고 이상적인 다윗 왕 계열의 현실 정치적 군주의 지도력 아래서 통일과 연합을 성취할 것입니다. (중략) 가나안 땅은 엄청난 번영과 평화를 누릴 것입니다.[* Ibid. pp.99-100, 118-122] 가장 압권인 것은 47장 강해. 김회권은 '아라바 광야와 사해'를 '암울하고 절망적이며,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사회 체제', 구체적으로는 신자유주의 체제로 해석하고, 이러한 현실에 [[야훼|하나님]]의 생명의 물~~[[보드카]]가 아니다~~이 유입되어 생명의 원리~~일반생물학 책 이름이 아니다~~가 구현되어야 하며, 그 역할을 교회가 수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에스겔 47장은 에스겔의 영적 일기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중략) 에스겔의 성전 비전의 완성판입니다. (중략) 성전에서 스며 나오는 생명의 보좌, 그 생명수는 왜 동쪽으로 흘러야 합니까?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지대에 위치한 죽음의 바다(사해)가 동쪽에 있기 때문입니다. 동쪽에 죽음의 바다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명수 강물이 동쪽으로 흐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수라면 이 생명수는 어디로 흘러야 합니까? 아라바 광야를 거쳐 죽음의 바다로 흘러들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전은 생명수 강물을 흘려보내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중략) '''하나님의 통치 보좌가 있는 성전에서 생명수가 흘러나와 죽음의 땅, 불모의 땅을 생명의 옥토로 변화시키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또한 하나님 나라 운동의 전위부대인 교회의 존재 목적이 아니겠습니까? (중략) >성전 문지방은 하나님의 보좌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이 있는 곳에서 생명의 강줄기가 흘러나온다는 말입니다. 지상의 교회가 하나님 보좌를 받치는 문지방 역할을 많이 할수록 더 많은 생명수를 흘려보낼 수 있습니다. '''만일 교회가 목회자나 장로, 신부나 사제들이 지배하는 격리된 분파가 된다면, 하나님의 생명수는 흘러나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참된 교회는 이 세상에 생명수 강물을 흘려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교회가 하나님의 보좌 대신 목회자의 왕국으로 바뀌어 가는 것은 심히 우려되는 현상입니다. 중세 [[교황]]급의 권위주의적인 목회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혼란을 가중시키는 그 같은 교황급 목회자, 심지어 세습을 시도하는 목회자들이 단기간에는 온유하고 민주적인 목회자들보다 큰 성과를 내는 것처럼 보입니다. (중략) 그러나 길게 보면, 하나님의 다스림을 대체하거나 대적하는 목회자의 다스림은 죽음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재정 비리, '''성 스캔들''', 세습 등 온갖 비리들이 그 같은 교회에 생겨납니다. (중략) >이런 점에서, 성전 문지방에서 하나님의 생명수가 흘러나온다는 것은 놀라운 하나님 나라 신학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나사렛 예수의 몸과 인격을 통해 생명수가 흘러나오듯이, 하나님의 뜻과 다스림에 순종으로 응답하는 곳, 곧 성전 문지방에서 생명수가 흘러나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교회는 생명수를 흘려보내는 교회가 된다는 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중략) 참된 교회는 하나님의 다스림에 복종하는 문지방이 되어야 합니다. '''죽음의 세력에 짓눌리는 사람들의 현실을 변혁하고, 그 현실을 비옥하게 적시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중략) >여러분! 어떤 의미에서 우리나라가 아라바 광야와 죽음의 바다 같지 않습니까? 지금 많은 모순이 보입니까? 양극화, 분단 의식, 집단 이기주의, 그리고 비인간화를 촉진시키는 교육 경쟁... 이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생명수가 유입되어야 합니다. '''복음의 가치관과 복음적인 대안이 스며들어야 합니다. 새로운 생명의 강이 스며드는 길만이 이 땅과 이 겨레의 죽음의 바다를 소생케 할 수 있습니다.'''[* Ibid. pp. 150-159] 이 부분은 이 책의 뒷부분에서 나오는 '낡은 가죽부대와 새 포도주'와 상당히 유사한 해석이며, 동시에 김회권의 '하느님 나라 신학'의 핵심이 되는 부분으로 볼 수도 있다. 이것을 요약하자면 '낡은 가죽 부대=아라바 광야와 사해=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정의롭지 못한 사회 체제, 새 포도주=생명의 물=낡은 체제를 뒤집어엎고 '공평과 정의에 입각한 대안적 세계 질서'를 건설하는 하느님의 능력'이라 할 수 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청년 설교 1>의 나머지 부분을 참조 바람. 전반적으로 에스겔의 메시지는 다른 예언서들에 나오는 것처럼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 → 핍박과 착취 → 심판과 징벌 → 회복 → 새로운 세상'으로 정리해 볼 수 있겠다. 현재의 암울하고 불의하며 절망적인 현실을 적나라하게 폭로하며 심판을 경고하는 한편, 미래에 열리게 될 '대안적 세계 질서' 로서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과 희망을 제시하는 것이 모든 예언서들의 메시지인데, 에스겔도 이 구도를 따르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