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엄복동 (문단 편집) == [[자전거 도둑]] == 엄복동은 생전 자전거 수십 대를 훔쳐 장물로 팔았다가 실형을 선고받은 전적이 있는 '''상습 절도범'''이었다. 그것도 그냥 생활이 너무 가난해서 한두 대 훔치는 정도의 수준이 아니라, 훔친 자전거 수십 대를 한꺼번에 팔아넘기는 전문 장물아비였다. 최초 보도는 1926년, 마지막은 1950년이므로 '''죽기 직전까지 24년간 계속 도둑질'''을 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자전거를 훔쳤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6100700209202022&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6-10-07&officeId=00020&pageNo=2&printNo=2186&publishType=00020|동아일보 26년 7월 10일자(3면)]] >---- >(현대 국어) '''조선의 자전거 선수로 유명한 엄복동이 절도 공범으로 징역을 선고받았다''' >경기도 부천군 다주면 장의리[* 現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숭의동]에 본적을 두고 시내 병목정[* 現 [[서울특별시]] [[중구(서울)|중구]] 쌍림동] 229번지에 거주 중인 이효진(35)은 절도 전과 2범으로, 올해 2월 25일부터 시내 곳곳에 있는 타인의 자전거 십여 대를 훔쳐다가 시내 초음정[* 現 서울특별시 중구 오장동] 111번지에 본적을 두고 병목정 129번지에서 자전거 매장을 운영 중인 엄복동에게 팔아달라고 의뢰하였다. '''엄복동'''은 이효진과 함께 훔친 자전거를 수 차례 원산에 가서 판매하다가 발각되어 두 명 모두 원산 경찰서에 체포되어 함흥지방법원에서 이효진은 [[절도죄]]로, 엄복동은 [[장물죄|장물취급죄]]로 지난 9월 20일에 각각 징역 4년, 징역 1년 6월에 벌금 50원의 판결을 받았으나 두 명 모두 판결에 불복, 항소하여 며칠 전 경성 고등법원으로 이관되었다. 한때 조선의 자전거 선수로서 당할 자가 없다고 여겨지던 용감한 엄복동은 지금은 [[서대문 형무소]]의 철창 안에서 신음하고 있다. 엄복동이 자전거 도둑으로 잡힌 [[1926년]] 당시 [[자전거]]는 지금과 달리 상당히 비쌌던 물건이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412592|관련기사]] 비싼 자전거는 '''[[쌀]] 수십 가마니'''[* 한 가마니는 약 80kg, 쌀값이 많이 떨어진 22년 현재 쌀값은 등급에 따라 3~5만원/20kg인 것을 생각했을 때 열 가마니만 해도 지금 돈 200만원쯤이 된다. 30가마니면 지금의 [[중고차]]값쯤이 될 것이다. ]수준이고, 엄복동이 26년 잡혔을 당시 훔친 자전거는 한 대가 아니라 '''십여 대'''였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004010032920202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0-04-01&officeId=00032&pageNo=2&printNo=1121&publishType=00020|경향신문 1950년 4월 1일자]] >---- >'''자전차왕 엄복동 자전거 훔치고 철창왕래''' >자전차왕으로 한때 이름을 날리던 경기도 양주군 회천면 덕계리[* 지금의 [[경기도]] [[양주시]] [[덕계동(양주)|덕계동]]] 이삼육 엄복동(61)은 생활에 궁한 나머지 지난 3월 22일 오후 9시경 시내 종로구 청진동 '''박연이(朴連伊)씨 소유의 자전차 시가 약 3만 원을 절취'''한 것이 탄로나 검찰청에서 문초 중 31일 [[기소유예]] 처분으로 석방되었다 한다. >----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0040100209104010&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0-04-01&officeId=00020&pageNo=4&printNo=8221&publishType=00010|동아일보 1950년 4월 1일자(4면)]] >---- >'''옛날의 은륜(銀輪)[* 은으로 된 바퀴. '자전거'를 아름답게 이르는 말이다.]왕자 자전거를 훔치다 들켜''' >비행사 [[안창남]] 씨와 더불어 우리나라의 은륜계에 명성을 날리던 엄복동(61) 씨는 그 옛날의 명성도 어디로 생활에 궁한 나머지 남의 자전거를 훔치려다 구속되었으나 인정[[검사(법조인)|검사]]의 따뜻한 온정으로 석방된 사실이 있다. 즉 왕년에 자전거 선수로 천하에 용명을 날리던 엄복동은 세월이 흘러 어느덧 육순이 넘은 노인이 되어 지금은 경기도 양주군 회천면 덕계리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는데 그날 그날의 끼니에 어려워 지난 22일 시내 종로구 청진동 575번지 박연이씨 댁 앞을 지나다 훌륭한 자전거 한 대가 박씨 문전에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한 순간 그 '''자전거가 대단히 훌륭한 데에 욕심이 나서 그 자전거를 훔치려고 하였으나''' 그만 사람들에게 발견되어 체포되었다고 한다. 그 후 [[서울지검]]에 송치되어 안희경 검사의 담당하에 취조를 받아왔는데 안 검사는 엄의 과거지사와 현재의 사정에 동정하는 바 있어 30일 [[기소유예]]로 석방하였다. 이것이 엄복동의 마지막 공식 기록이다. 1950년 절도사건의 경우 '''30,000 원'''이라고 가격이 구체적으로 보도되었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004110032920200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0-04-11&officeId=00032&pageNo=2&printNo=1129&publishType=00020|당시 기사]]를 보면 당시 쌀 가격은 약 8kg에 2,300원을 돌파한 상황이었으니 엄복동이 훔친 자전거는 쌀 한 가마니보다 비싼 가격이었다. 당시 공무원 월급인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0032100329202003&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0-03-21&officeId=00032&pageNo=2&printNo=1111&publishType=00020|9,300원]]에 비교하면 3배 이상이고 1950년 4월에 조사한 서울의 5인 가구 1개월 생활비가 약 40,000원인 것을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0032100329202003&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0-03-21&officeId=00032&pageNo=2&printNo=1111&publishType=00020|감안하면]] 현대 기준으로는 3~400만 원짜리 자전거를 훔쳤다.[* 현대 기준으로 [[자이언트(자전거)|자이언트]] 프로펠 어드밴스 1 디스크 모델(399만원)이나 [[스페셜라이즈드]] 루베 콤프 디스크(390만원)정도 되는 자전거를 훔친 셈이다.] 자전거가 왜 이리 비싸냐고 의아해 할 수 있으나, 당시 공업기술은 지금만큼 좋지 않았기에 정밀한 부품으로 구성된 자전거는 제작 난이도가 매우 높았다. 또한 대부분 수제로 조립되었으며, 특히 대한민국은 1950년 당시 자전거 생산 기반이 없어[* 최초의 [[대한민국]] 국산 자전거는 엄복동이 사망한 후인 1952년 [[기아산업]](현 [[삼천리자전거]])에서 생산되었다.] [[자전거]] 자체를 전량 수입('''[[일본]], [[미국]]''')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특히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철(원소)|철]], [[구리(원소)|구리]], [[알루미늄]] 같은 산업 필수 금속의 가격이 엄청나게 폭등'''했기에 가격이 더욱 치솟았다. 자전거가 현대처럼 가격이 내려간 것은 [[대만]]에 있는 [[자이언트(자전거)|자전거 회사]]가 전 세계 자전거 프레임을 [[1980년대]] 말에 통일시키면서부터다. [[1기 신도시]] 개발로 인해 자전거가 보급되기 시작한 초기인 [[1993년]]만 해도, 외제 [[로드바이크]]나 [[MTB]] 한 대 가격은 한국에서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3071300099111005&editNo=14&printCount=1&publishDate=1993-07-13&officeId=00009&pageNo=11&printNo=8472&publishType=00010|600만원이였다.]] [[1993년]] '''당시 [[현대자동차]]의 [[스쿠프]] 가격이 700만 원대'''였다. 지금처럼 고급 로드바이크나 [[MTB]]가 50~100만 원대에 출시될 수 있는 것은 [[2010년]] 이후에나 가능해졌다. 이 때문에, 2019년 개봉된 영화 [[자전차왕 엄복동]]이 구설수에 올랐다. 아무리 당시 한일전에서 승리한 자전거 챔피언이라고 하더라도,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나 독립운동에 참여하지는 않았기에 항일투사로 보기도 어려운 데다 자국 국민의 자전거를 훔쳐 팔아치운 범죄자인데 이런 인물을 영화를 통해서 미화를 해도 괜찮냐는 것이다. 자세한 것은 [[자전차왕 엄복동#s-8.1|해당 문서의 미화 논란 문단]]도 참조. '''엄복동의 손자인 엄재룡 엄복동기념사업회 회장과 가족들은 [[https://entertain.v.daum.net/v/20190523100155973|몰랐다고 주장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