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어진/조선(대한제국) (문단 편집) == 부산 용두동 대화재 == 이후 [[6.25 전쟁]]이 발발하여 한국전쟁 당시에 다른 황실 유물과 함께 부산으로 내려와 부산 관재청 벽돌식 창고에 보관되었다. 하지만... ||<-2><:> [[파일:attachment/busanyongdodong1.png|width=565&height=368]] || ||<-2><:> 부산 용두동 대화재 당시.[* 참고로 이 사진은 어진들을 불태운 12월 26일 당시 사진이 아니라, 약 보름 전인 12월 10일에 같은 장소에 있던 또 다른 화재 모습을 담은 사진이다.]|| [[1954년]] [[12월 26일]]에 발생한 화재로 온갖 동란을 꿋꿋이 이겨내며 한국전쟁 시기까지 전해지던 어진들 대부분이 유물 3400여점과 함께 타버렸다. 자세한 내용은 [[부산 용두산 대화재]] 참고. [[http://blog.naver.com/minsu977/220927241774|이곳에서 화재 당시 상황이 자세하게 나와있다.]] ||<-2><:> [[파일:QHUCJoB.jpg|width=565&height=500]] || ||<-2><:> 1935년 신선원전에 마지막으로 기록된 어진 현황(네이버 케스트 자료) || 결국 신선원전에 대대로 소장되었던 어진 48축[* 이 보고서 내에는 46축이 보관되어 있다고 나오지만, 이 보고서 작성 후에 세조와 원종 어진 모사본이 1축씩 추가되었다.] 중 지금까지 전해져 오는 어진들은 총 18축 정도밖에 없게 되었다. 밑은 당시 화재에서 건져낸 어진들의 목록이다. * 태조: 익선관본 1축[* 홍룡포본 1축이 얼굴 부분까지 반소된 상태로 전해지고 있다. 1926년 6월 10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태조 어진이 선원전에 있는 또다른 어진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으며, 다른 하나의 어진은 경기전에도 소장된 청룡포본 어진을 원본으로 삼아 그렸을 가능성이 높다.] * 세조: '''없음'''[* 다만 1936년에 모사본을 제작할 시에 그린 초본은 멀쩡하게 남아 있다.] * 원종: 사모본 2축[* 1872년 원본은 표제는 남았으나 얼굴이 소실되었고, 1936년 모사본은 얼굴은 남았으나 표제가 소실되었다.] * 숙종: 익선관본 1축('''추정''')[* 얼굴은 물론, 표제까지 불타 어진 속 왕은 알 수 없으나 숙종의 어진으로 추측된다.] * 영조: 연잉군 시절 사모본 1축, 익선관본 1축[* 신선원전에 어진이 보관되던 왕들 중 '''유일하게''' 얼굴이 남은 어진이 2축 이상 전해지는 왕이다. 전대의 태조는 외부에 어진이 남아있고, 후대의 고종과 순종은 사진 자료가 많이 남아 있으니 논외.] * 정조: '''없음'''[* 추정 어진조차 남아있지 않는 '''유일한''' 왕이다. 물론 추정 어진이 남아있지 않은 것은 세조도 마찬가지이지만, 적어도 세조는 전술했듯 초본이라도 멀쩡하게 남아있다.] * 순조: 원유관본 2축, 익선관본 1축 + 익선관본 1축('''추정''')[* 익선관본 1축은 표제가 불타 어진 속 왕을 알 수 없으나 순조의 어진으로 추측된다. 이 추정어진이 진짜 순조 어진이면 순조는 원종과 함께 신선원전에 보관되던 어진들이 후대에 모두 전해지는 유이한 왕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렇게 보면 4축의 어진들이 '''모두''' 얼굴이 타버린 상태로 후세에 전해지게 된 것과 똑같다.] * 익종: 면복본 1축 + 면복본 1축('''추정''')[* 전자는 표제는 남았지만 얼굴이 눈썹 말고는 모두 소실되었고, 후자는 얼굴과 표제가 모두 소실되었다.] * 헌종: 익선관본 1축('''추정''')[* 순종의 황태자 시절 초상화일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 철종: 면복본 1축, 원유관본 1축, 구군복본 1축[* 그들 중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구군복본 1축뿐이다.] * 고종: 익선관본 1축('''추정''')[* 신선원전에 보관되었던 어진은 무려 '''9축'''으로 왕들 중 제일 많았지만, 화마에서 살아남은 것은 파편 일부만 남은 추정 어진 '''1축'''밖에 없다.][* 현재 남아있는 고종 어진은 황명으로 제작한 어진이 아니라 정식으로 제작 후에 고종의 유지 초본을 가지고 있었던 화가 채용신이 민간인에게 그려준 어진이다. 그래서 황룡포 3점이 남아있지만 모두 같은 나이의 고종이며 초상화로 유명했던 채용신의 평소 실력에 비해 그림의 작품성이 부족하다는 평을 받는다. 그 밖에 황실에서 보관한 어진은 1872년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20세의 고종 어진을 제외하고 모두 소실되었다.] * 순종: 황룡포본 1축[* 얼굴 부분은 남아있지만, 표제 부분이 훼손되었다.] 그 중 9축은 보존 처리 후 2019년 후반부에야 공개될 정도로 심각하게 훼손되었고[* 순조어진 2축, 철종어진 2축, 추정어진 5축], 나머지 4축도 얼굴 부분이 소실되었으며[* 태조어진 1축, 원종어진 1축, 순조어진 1축, 익종어진 1축], 얼굴이 보존된 어진은 단 '''5축'''밖에 없다.[* 원종어진 1축, 영조어진 2축, 철종어진 1축, 순종어진 1축][* 1926년 6월 10일자 동아일보에 사진이 실린 태조 어진이 진짜 신선원전 어진이라고 쳐도 현전하는 신선원전 어진은 6축밖에 되지 않는다.] 물론 조선 왕들의 경우 어진이 없더라도 얼굴을 복원하는 것은 '''이론상으로는''' 불가능하지 않은데, 이는 [[리처드 3세]]의 경우처럼 각 왕릉에 묻혀있는 왕들의 두개골만 스캔해도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당시 약탈된 [[성종(조선)|성종]]의 능과 [[중종(조선)|중종]]의 능을 제외하곤 [[도굴]]된 적이 없다. 다시 말해, [[성종(조선)|성종]]과 [[중종(조선)|중종]]의 얼굴은 이런 방식으로도 알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이다.][* 다만 눈썹이나 귀, 입술 등 세세한 부분까지는 복원이 불가능하다. 당연하게도 해당 부위들은 뼈가 아닌 털, 연골, 피부기 때문. 실제로 법의학계나 인류학계에서도 얼굴 복원을 할 때 가장 고민하는 부분이다.]아니, 어쩌면 썩어서 뼈로 변하지도 않은 채 미라처럼 되어 있을지도... 조선 시대에 조성된 무덤을 이장하는 과정에서 미라처럼 된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뉴스가 간혹 들려오는데, 이는 석회·모래· 흙을 혼합한 삼물(三物) 반죽으로 무덤을 만든 데 따른 현상이다. 이 삼물 반죽이 외부로부터 유입되는 공기를 완벽히 차단해 준 덕분에 시신이 썩지 않았던 것. 1868년 오페르트 일당이 [[남연군]] 묘를 도굴하려고 기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했던 것도 바로 이러한 무덤 조성 방법 때문이었다. 이상 언급한 사례들로 미루어 보면, 그야말로 정성 들여 조성되었을 왕릉 내부의 시신도 미라처럼 되었을 거라는 추론이 아주 불가능한 기대는 아닌 셈.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0&aid=0001993100|조선 왕릉 석실에 대해 다룬 기사]] 다만 아무리 민주주의 공화정 시대라 해도 왕의 얼굴을 복원한답시고 말짱한 남의 무덤을 함부로 파내는 게 여론에는 좋지 않게 비칠 터이고 [[전주 이씨]] 종친회의 거센 반발을 이겨내야 하기 때문에 이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조선 왕실의 어진과 진전' 특별전을 [[2015년]] [[12월 8일]]부터 [[2016년]] [[2월 14일]]까지 열었다. 이 전시회에 출품된 어진은 태조 어진 2점(청룡포본(복제품), 홍룡포본), 원종 어진 1점(사모본), 영조 어진 2점(사모본, 홍룡포본), 문조 어진 1점(면복본), 철종 어진 1점(군복본), 고종 어진 1점(석지 채용신이 그린 황룡포본), 순종 어진 2점(이당 김은호가 그린 황룡포본, [[2014년]] 복원한 모사도)이다. 다른 어진과는 달리 순조 어진은 전시되지 않았다. 대구의 [[계명대학교]] 행보박물관에서도 2016년 10월 12일부터 12월 24일까지 어진 전시회가 있었는데, 홍룡포본 태조어진(불에 타서 훼손된 원본과 복원본), 익종어진, 원종어진, 영조어진(연잉군초상 포함 두 점), 철종어진(원본과 복원본), 고종어진과 순종어진이 전시되었다.[[http://www.gukje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570186|#]] 2019년 2월 발표된 논문에서는 선원전어진모사등록에 등록된 어진 중 누락된 어진이 있음을 증명했고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신원 미상의 어진 2점과 철종 어진, 순조 어진이 공개되었다. 그밖에 추존왕의 어진인 [[이자춘|환조]]의 어진을 정종 때 계성전에 모셨다고 하는데[* https://www.chf.or.kr/c2/sub2_2.jsp?thisPage=1&searchField=&searchText=&brdType=R&bbIdx=102281|#], 후대에 추존왕의 어진은 모시지 않는 것이라는 여론이 나타나 철폐되었다. 이때 환조의 어진은 어디로 갔는지 행방불명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화장사에 있던 [[정종(조선)|정종]] 부부의 어진으로 추정되는 어진과 공민왕 내외의 어진이 함께 존재했다 하는데 정종으로 추정되는 어진 역시 그 행방을 알수없는 상태이다. 6.25전쟁 당시 화장사가 폭격 당한걸 봐서는 그때 다른 어진과 함께 소실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북한쪽에 있던 어진들도 행방을 알수없는 상태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