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어머니 (문단 편집) == 성격 == [[가부장적]] 문화가 있는 나라에서는 대부분 그렇지만, 자애로운 어머니상이 있다.[* 가부장적인 사회가 많이 희석된 사회일수록 이런 경향은 줄어든다. 10~20대가 어머니에 대해 생각하는 것과 40~50대 이하인 세대가 생각하는 걸 보면 딱 보일 것이다.] 아버지는 근엄하고 무서운 반면, 어머니는 한없이 자식을 사랑하는 이미지가 있다. 물론 실제로도 그런 경우도 많다. 아버지는 자식과 조금 서먹해하고, 어머니는 자식과 소통도 많이 한다. '남성'과 '여성' 자체의 소통의 차이도 있고, 가장은 대개 생산 활동에 참여하여 가정에서 보내는 시간이 적은 것도 있다. 따라서 아버지가 자식과의 소통의 시간과 기회가 많다면 어머니만큼 친밀도가 높은 가정도 많다. 물론 부모와 자식의 노력이 없으면 어머니든 아버지든 소통이 단절되는 경우도 있다. 특히 [[사춘기]] 아이의 경우 "됐어!" "몰라!"를 입에 붙이고 산다. 위의 영상에서 보듯 [[잔소리]]가 심하다. 어머니들은 자신이 아이를 위해 그런 말을 한다고 주장하지만 사실 거의 화풀이에 가깝다. 지긋지긋해할지 모르지만 막상 잔소리를 듣지 못하는 때가 오면 그리워진다. 하지만 어지간히 크게 싸우거나 의견대립이 있는 게 아닌 이상, 잔소리를 하시면서도 이것저것 잘 챙겨주신다. 반대로 자녀가 챙겨주거나 예상치 못한 선물을 했을 땐 역으로 비슷한 반응을 보일 때도 있다. 답답한데 사랑하고, 좋은데 귀찮은 듯. 당신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아군이다. 자식이 큰 잘못을 저질러도 끝까지 놓지 못하는 존재가 바로 어머니다. [[사형]], [[무기징역]]을 받은 흉악범들이 다른 모든 가족(역시 부모인 아버지까지도)에게 의절을 당해도, 어머니만은 대부분 연을 끊지 못한다고 한다. 이쪽에서 유명한 사례가 1970년대에 사형을 선고받은 사형수 양동수[* 술에 너무 취한 나머지 자신의 애인 집을 착각하여 다른 집에 잘못 들어갔는데 이것이 화근이 되었다. 잠을 자고 있는 모르는 여자를 자신의 애인으로 착각해, 반항하는 여자를 죽이고 말았다.]의 어머니.[* 다만 양동수는 술에 취해 홧김에 저질렀으며, 반성의 여부가 1도 없는 고의성 살해의 경우 어머니도 연을 끊는 편이다.(대표적으로 [[안인득]].)] 그녀는 "이 늙은이, 내 자식이 감방 차가운 냉골에서 추위에 떠는데 어찌 어미가 뜨뜻한 방에서 발을 뻗고 잘 수가 있습니까? 자식과 자신은 공범자이니 추운 냉골에서 죄값을 조금이라도 치러 죽은 자의 명복을 빌어야 한다"며 교도소 담장 밑에 움막 수준의 집을 짓고 꼬박 3년을 거기서 살았고,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자식이 있는 교도소 담벽을 향해 기도한 후, 교도소 아래에 위치한 화장사 암자에서 주지와 함께 부처님께 108배로 기도했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70대. 그 노구에 새벽녘이 되면, 빗자루를 들고 동네 거리 구석구석을 깨끗이 쓸었다. 빗자루로 지저분 거리를 쓸 듯이 자식의 죄업을 참회로 대신하겠다는 생각이었다. 뿐만 아니라 동네 오물 청소, 초상집에 찾아가 염습해주기 등 죄를 씻기 위해 어떤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동네 사람들은 3년 동안에 하루도 거르지 않는 할머니의 정성에 반했다. 교도소에 있는 아들의 얼굴을 보기 위해 1번으로 면회를 신청하고 자식을 보는 세월이 3년째, 면회자 1번은 늘 어머니의 번호였다. 양동수는 죄책감으로 인해 자신이 빨리 죽어야만 늙은 어머니를 고향에 내려가게 할 수 있다며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교화 담당 스님 [[삼중(승려)|삼중]]이 찾아와 아들이 자살을 하려는 지경이니 제발 그만하고 고향에 돌아가 편히 지내라고 설득하자, 그럴 수 없다며 "내 새끼가 죽으면 그 시신을 내 손으로 인수해서 부처님의 법으로 화장하렵니다. 뼈를 내 손으로 곱게 갈아서 밥풀과 꿀에 묻혀서 까치 밥으로 보시시키려 합니다. 짐승이라도 내 새끼의 몸을 먹어주어야만 살인의 죄업을 조금이나마 덜고자 합니다. 자식을 먼저 저승으로 보낸 어미가 어찌 하늘이 무서워 살 수 있겠습니까? 나도 내 자식 죽은 이 자리에 돌아와 자결하렵니다. 스님이 이 늙은이를 불쌍히 여기신다면, 스님 손으로 화장해 주십시오. 나 같이 죄 많은 늙은이 뼈를 곱게 갈아 밥풀과 꿀을 발라 까치 밥으로 만들어 주세요!"라고 울부짖었다고. 삼중 스님은 이에 감동하여[* 후일(1992년) 쓴, 자신이 교화 담당자로서 만난 사형수와 그 가족들 이야기를 다룬 책 <사형수 어머니들이 부르는 통곡의 노래>(전3권) 1권의 부제 "내 죽거든 뼈에 꿀을 발라 까막까치밥으로 뿌려주오"가 바로 이 이야기에서 따온 것이다. 참고로 2권 부제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내 아들아 이 애미 젖 한번 먹고 가려므나", 3권은 "가난이 죽인 불쌍한 내 자식이 마지막 사형수이길 빕니다".] "이제 양동수를 죽이면 두 사람을 죽이는 꼴이 되니 최소한 노모가 돌아가신 이후로 집행을 연기해 달라"고 법무부 장관에게 탄원하였다. 이 이야기가 언론에도 나오고, MBC의 인기 라디오 프로그램 법창야화에 '모정불심'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결국 그녀의 아들은 '''무기수로 감형되었고, 수감 21년째 되던 해 모범수로 선정되어 마침내 석방되었다'''. 그리고 스님이 되어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하며 살게 되었다.[* 어머니는 17년간 옥바라지를 하다 가석방 결정 3년 반 전에 세상을 떠난 상태였다. 정말 신기하게도, 교도소장으로부터 석방건의서가 법무부장관에게 상신되었다는 결정을 듣던 바로 전날 밤 양동수는 꿈을 꿨다고 한다. '''어머니가 나타나 "동수야, 니 서류가 다 됐다'''. '''나는 이제 갈란다. 잘 있그래이."하고 떠나가는 꿈이었다'''.] 이 이야기는 이 분야에서 전설이 되었으며,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도 언급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