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양희은 (문단 편집) == 소개 == || [[파일:external/img.maniadb.com/100217_f_1.jpg|width=250]] || || 젊을 적 모습. || >'''너 이름이 뭐니?''' - 양희은의 최고 유행어 [[한국]]의 [[가수]], 방송인. '''대한민국 포크 장르의 대모'''. 한국 [[포크송|포크]]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중후한 성량, 노년 여성의 이상적 전형이라 할 수 있는 음색을 가졌다.[* 데뷔 초인 1970년대 초에는 맑은 미성이었다. 또한 숏컷을 고수하는 등 [[미소년]] 같은 비주얼이었다.] 여기에 본인의 곡들도 가사 하나 하나가 연륜을 담고 있어 청자들의 감성을 금방 끌어낼 수 있는 가수. 특히 노래로 구슬픈 감정을 표현하는 능력은 대한민국에서 따라올 가수가 없다. [[엄마]]의 입장으로 부르는 노래도 몇 곡 가지고 있으며, 워낙 음색이 노래의 감수성과 잘 맞아떨어져서 방송에 출연해 '''"엄마가 딸에게"'''[* [[동물원(밴드)|동물원]]의 김창기가 작곡한 곡들 중에서는 가장 최근 히트곡이 되었다.]를 불렀을 땐 객석을 눈물바다로 만들기도 했다. 특징으로는 친한 손윗남자들을 '[[형]]'이라고 부른다는 것. 사실 1990년대 초반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대학에서 여자 후배가 남자 선배에게 '형'이라고 부르는 것은 종종[* 청춘드라마 [[내일은 사랑]]에서도 한혜빈([[박소현(배우)|박소현]])이 신범수([[이병헌]])를 형이라고 부르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운동권의 경우에는 흔하게 있었던 일이었다. 사실 한국어에서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님', '어머님', '언니', '형', '누나', '오빠'와 같은 친족 단어들은 원래 실제 혈연 친족 관계에서만 사용되었다. 그러나 20세기 초반부터 하나씩 비혈연 관계에도 사용되기 시작한다. 20세기 초반에 '할아버지', '할머니'가 빠져나온 게 시작이었고, '오빠'가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쯤 가장 나중에 빠져나왔다. 그래서 지금도 50~60년대 출생자들 중, 여자가 나이 많은 남자친구에게 '오빠'하고 부르는 걸 "자기 오빠도 아닌데 왜 오빠냐 부르냐"고 싫어하는 경우도 있다.[* 더욱이 80년대까지 한국 대학가에는 '학형(學兄)'이라는 개념이 존재했기에 당대의 [[여대생]]들은 남자 선배에게 흔히 '형'이라고 칭했던 시대 분위기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여동생은 배우 [[양희경]]. 195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청소년 시절에 서울 [[YMCA]]가 운영하던 청소년 쉼터 "청개구리"를 다녔는데 그곳에서 만난 사람이 바로 양희은의 음악인생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인 [[김민기(가수)|김민기]]였다. 김민기가 없었다면 현재의 양희은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아버지가 육군 대령이었으나, 39세의 나이로 일찍 사망하는 바람에 집안이 기울어 대학시절 끼니는 물론이고 교통비조차 없어서 걸어다녔다고 한다.[* 가세가 기울었다고 하나, 당시 살던 곳이 종로구 누상동의 [[옥인아파트]]이다. 70년대 초에 각 집마다 경유 보일러로 개별 난방/온수 공급에 자가용 가진 집도 여럿이었고 아파트에 전용 교환실이 있어 전화 없는 집 없고, 실외이었지만 입주자용 수영장까지 있어 연예인들이 여럿 살던 아파트이다. 집을 유지할 정도 군인 유족 연금은 나왔겠지만 다른 수입이나 재산 없이 집만 있었던 듯.] 이 때문에 먹고 살기 위해 노래를 해야만했고 무대에 올려 달라고 부탁했던 사람이 바로 [[송창식]]이었다. 송창식은 자신이 노래를 부르던 [[명동(서울)|명동]]의 맥주집에 데리고 가서 자신의 공연시간 10분을 떼주면서 일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고 한다. 놀러와 설날 특집 [[세시봉]] 콘서트때 양희은이 직접 언급. 송창식에게 '형 저 노래 하고 싶어요' 라고 하자 송창식이 '노래 하고 싶어?' 라고 묻고는 자신이 공연하던 맥주집에 데려가서 자기 공연시간의 일부를 때줘 무대에 세워줬다. 받아준것만으로도 감지덕지인데 양희은은 맹랑하게 사장에게 가불을 부탁했고 4만원을 받아냈다. 당시 국립대학교 한학기 등록금이 7천원이었다. 사장이 엄청난 대인배였던 셈. 물론 송창식을 믿고 내준 게 더 컸겠지만. 사람 추천 안하기로 유명한 송창식이 추천한 사람은 양희은이 최초라고 한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가수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71년 9월에 발매된 양희은의 첫 정규앨범 "양희은 고운노래 모음"을 냈는데 여기에 수록된 김민기의 '''"[[아침 이슬]]"'''과 '''"세노야 세노야"'''는 양희은 하면 떠오르는 대표곡이 되었다. 하지만 [[아침 이슬]]이 금지곡이 되면서 그녀의 노래들도 덩달아서 금지곡이 되는 슬픔을 겪어야 했다. 그녀의 대표곡인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왜 사랑이 못이루어지냐'''라는 황당한 이유로 금지곡이 되었고, '''"[[작은 연못]]"'''의 경우는 '''[[김종필]]과 [[이후락]]의 권력다툼을 비꼬았다'''라는 이유로 금지곡이 돼버렸다. 무려 30여곡의 노래가 금지곡이 돼버렸으니... 이때는 별 이유 같지도 않은 이유로 금지를 먹이는게 허다했다. 송창식의 "왜 불러"만 해도 사용된 영화에서 청년 둘이 장발 단속을 피해 튀는 장면에서 나와서 공권력을 조롱한다는 이유로 금지를 먹었던 시대다. 아이러니칼 하게도 그녀는 1975년에 정부에서 수여하는 '''대한민국 가수상'''을 수상했다.~~병주고 약주기 클라스~~ 70년대 후반에 이주원과의 공동작업으로 나온 '''"한 사람"''', '''"들길 따라서"''', '''"네 꿈을 펼쳐라"''' 등은 주옥같은 곡들로 평가받는다. 1981년에 한국을 떠나서 1년여간 [[미국]]과 [[유럽]] 등을 여행하고 돌아왔지만 이듬해인 1982년에 그녀는 [[난소암]] 진단을 받고 인생의 중대 기로에 서게 되었다. 2번에 걸쳐 암수술을 받았고 투병 생활[* 암투병 자체는 많이 알려져 있었지만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 의외로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3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았을 정도로 병세가 위중했다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암치료를 끝내 거부했다는 점이다.]을 하는 등 인생의 굴곡이 많았다. 여동생인 [[양희경]]은 직접 옆에서 병간호를 했으며, 병고로 겨우 신음소리만 내는 그녀의 모습에 "정말로 언니가 죽는 줄 알았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이 일로 자식을 가질 수 없게 되었지만, 남편과 [[강아지]]들을 자식 삼아 키우며 긍정적으로 살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그런 와중에도 1985년에 발표한 [[하덕규]] 작곡의 '''"[[한계령]]"'''은 뛰어난 곡으로 평가를 받았다. 발표 당시에는 너무 무거운 분위기라 음반사가 홍보를 포기해버렸지만 1990년에 다시 발표했을때 큰 찬사를 받았다고 한다. 연작 소설 [[원미동 사람들]]의 마지막 편인 "한계령"이 바로 이 노래에서 제목을 따왔다. 1987년 민주화 이후에 양희은의 금지곡들은 모두 해금조치 되었고 뛰어난 뮤지션으로 재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2002년에는 데뷔 30주년을 맞아 30주년 기념음반과 콘서트를 가졌고 2011년에는 데뷔 40주년을 맞아 그동안의 인생을 되돌아보는 뮤지컬 "어디만큼 왔나"를 2011년 8월 중순까지 공연하였다. 1집과 20주년 기념앨범은 각각 67위와 91위로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에 선정되었다. 포크 가수로 유명한 편이지만 의외로 [[신중현]]과 협업하면서 사이키델릭 포크를 시도하기도 했다. 평은 좋지만 너무 시대를 앞서갔는지 묻혔다. [[http://weiv.cafe24.com/review_view.html?code=album&num=1774|리뷰]] 2010년 시점으로도 이 음반은 60만원을 호가하는 희귀 음반이다. 가수 경력 뿐만 아니라 라디오DJ로서도 전설적이다. 젊은 시절부터 [[기독교방송|CBS]], [[동양방송|TBC]] 등에서 팝 음악방송 DJ를 했을만큼 방송 경험도 풍부한 편이다. 1992년에 다시 CBS로 돌아와 "양희은의 정보시대"를 진행했고 SBS에서 "두시의 친구 양희은입니다"를 1998년까지 진행했으며 [[손숙]]의 뒤를 이어서 1999년부터 2020년 현재까지 [[MBC 표준FM]] [[여성시대 양희은, 서경석입니다]]를 진행 중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이런 경력에도 불구하고 MBC 라디오에서는 타 방송사의 경력을 인정해주지 않아 MBC 라디오 명예의 전당인 [[골든마우스]]에서 브론즈 마우스(10년차 이상) 시상에 그쳐야 했다. 아직도 목소리에 힘이 가득하기로 유명하다. 젊을때나 지금이나 목소리가 매우 힘차고 또렷해서 듣기만 해도 양희은임을 알아챌 수 있다. 다만 동생도 목소리가 매우 비슷해 속기 쉬운데, 물론 양희경이 좀더 나긋나긋하지만 작정하고 따라하면 친척도, 지인도 구분이 어렵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