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양호(삼국지) (문단 편집) === 타루비 === 양호가 세상을 떠나자 양양 일대 백성들이 몹시 슬퍼하여 그가 도독으로 지내던 시절 즐겨 거닐던 현산[* 오늘날의 후베이성 샹판시 남쪽에 있는 현수산(峴首山)이다.]에 비석을 세워 고인을 기리기 시작했는데, 좀 더 구체적인 경위는 아래와 같다. >어느날 종사중랑 [[추담]] 등과 함께 현산에 올라 술과 시문을 즐기던 때 양호가 "이 산은 천지가 생긴 옛적부터 많은 현인재사들이 올랐고 그보다 더 무수히 나처럼 평범한 사람들도 올랐지만, 그들의 이름은 모두 역사에 묻힌지 오래이니 얼마나 슬픈 일인가. 하지만 나는 죽어서 사람들에게 잊혀진 뒤에라도 계속 이곳에 오르고 싶다네."라고 말하자 추담은 "공의 높은 덕은 모두가 아는 바이니 이 산과 더불어 길이 전해질 것입니다."라 답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세설신어]]에도 실려있다. 이런 연유로 양호를 기리는 비석을 현산에 세웠으며, 그 비석에 적힌 내용을 읽고서 울지 않는 이가 없을 정도라 해 타루비(墮漏碑)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후대 [[당(통일왕조)|당나라]] 때에 양양 출신인 맹호연이나 [[이백]] 등이 이 비를 소재로 시를 남기기도 했으며, 삼국지연의에도 아래에 서술된 호증의 시를 약간 변형해 양호의 죽음 뒤에 실어 놓았다. [[신조협려]]에서도 타루비가 나온다. 덧붙여 우리나라에도 [[전라남도]] [[여수시]] 고소동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타루비([[대한민국의 보물|보물]] 제 1288호)가 남아 있는데, 바로 이 양호의 고사를 본받아 이순신 장군의 덕을 길이 추모하려는 뜻에서 세웠다고 적혀 있다. 이로 미뤄보면 조선 시대에도 양호는 여전히 덕장의 대명사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