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양치질 (문단 편집) == 역사 == [[파일:양지(2).jpg]] 역사는 굉장히 오래되었다. 무려 5천년도 더 된 옛날부터 사람은 이를 닦아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칫솔로 이를 닦았던 흔적이 출토되었다. 아랍권에서는 미스왁(Miswak)이라고 불리는 나무의 가지를 잘라 껍질을 벗기고 목질을 이로 씹어 솔처럼 만들어 양치하였다.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가 미스왁으로 양치질하기를 좋아했다는 [[하디스]](전승)가 있는 관계로, 보수적인 무슬림들은 지금도 칫솔 치약을 거부하고 미스왁만 사용하거나, 혹은 칫솔 치약과 미스왁을 병용한다. 실제로 사용해보면 생각보다 잘 닦여서 왜 이런 방식으로 양치질했는지 대번에 이해가 된다. 다만 한국인들이 사용하기에는 미스왁 나무 특유의 냄새가 고약한 편. [[파일:양지(1).jpg]] 이는 한국 또한 마찬가지였는데, 옛날에 [[버드나무]] 가지를 주로 사용해서 양지(楊支)라는 말이 현재 양치(養齒)라는 말로 와전되었다. 실제로 써본 사람 말에 따르면 굉장히 쓰다고 한다. 물론 이런 물건 만들 돈도 없는 사람들은 그냥 아무 나뭇가지나 손가락 등을 이용했다. 이런 양치질을 할 때 [[소금]]을 썼다는 말이 있으나 과거에 소금이 무지막지하게 비쌌던 것을 생각하면 역시나 평민층 이야기는 아닌 듯하다.[* [[고대 로마]]의 상류층들은 치아미백을 위해 오줌을 사용했다고 한다.] 재나 모래를 썼다는 이야기도 있다. 사실 소금의 경우 고대엔 고기나 생선 등의 음식들을 최대한 오래 보존하는 방법인 염장용도로 주로 쓰였기에 상류층을 제외하곤 소금으로 양치한다는건 꿈도 못꿀 일이었다. 그나마 어부들이나 해군들, 소금장수들, 무역상들 같이 바다를 접하는게 일상인 사람들은 남아도는 소금으로 양치를 하기도 했었다. 사실 고대엔 상류층을 제외하면 굶는 것에 익숙하던 시대라 양치를 한다는것 자체가 상상도 하기 힘들기도 했고, 또 굶는게 익숙했던 만큼 양치질을 못하더라도 상류층에 비하면 충치에 시달리는 일이 비교적 덜했다. 어쨌든 [[연암 박지원]]의 [[양반전]]을 보면 [[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grpId=&itemId=BT&gubun=book&depth=5&cate1=H&cate2=&dataGubun=%EC%B5%9C%EC%A2%85%EC%A0%95%EB%B3%B4&dataId=ITKC_BT_0568A_0080_010_0060|원문]]에 양반의 덕목으로 양치질을 한번도 아니고 '''2번씩 언급'''하여[* 전자는 가글 비슷하게 읽히긴 한다.] 조선시대 사람들이 양치를 중요하게 여겼다는 걸 알 수 있다. ||...대체 그 양반이란, 이름 붙임 갖가지라. 글 읽은 인 선비 되고, 벼슬아친 대부 되고, 덕 있으면 군자란다. 무관 줄은 서쪽이요, 문관 줄은 동쪽이라. 이것이 바로 양반, 네 맘대로 따를지니. 비루한 일 끊어 버리고, 옛사람을 흠모하고 뜻을 고상하게 가지며, 오경이면 늘 일어나 유황에 불붙여 기름등잔 켜고서, 눈은 코끝을 내리 보며 발꿈치를 괴고 앉아, 얼음 위에 박 밀듯이 《동래박의(東萊博議)》를 줄줄 외어야 한다. 주림 참고 추위 견디고 가난 타령 아예 말며, 이빨을 마주치고 머리 뒤를 손가락으로 퉁기며 침을 입 안에 머금고 가볍게 '''양치질하듯''' 한 뒤 삼키며 옷소매로 휘양〔揮項〕을 닦아 먼지 털고 털무늬를 일으키며, 세수할 땐 주먹 쥐고 벼르듯이 하지 말고, '''냄새 없게 이 잘 닦고''', 긴 소리로 종을 부르며, 느린 걸음으로 신발을 끌 듯이 걸어야 한다...|| 옛날이라고 [[입냄새]]가 없었을 리는 없고 오히려 영양 불균형과 각종 질환으로 더 심하게 악취가 났을 테니 양치는 형편 되는 사람들의 필수적인 위생 조치였을 것이다. 의외겠지만 [[치약]]도 역사는 제법 있다. 보통 치약이 한 19세기나 20세기 정도 발명품으로 아는 경우도 있는데, 프랑스에서 왕실 전용 청결용품으로 기획되어 루이 15세에게 진상된 것이 역사상 최초의 치약으로 기록되어 있다. [[루이 14세]]가 모든 것을 다 누리고도 충치 때문에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말년을 보낸 것과 관계가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시 치약은 역시 값이 비싸 왕족이나 귀족이나 부자들이나 썼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