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양쩡신 (문단 편집) === 소련과의 관계 === 한편 [[러시아 제국]]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던 신강성은 외부 정세에 더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청나라 붕괴 이후 몽골에서 [[젭춘담바 후툭투]] [[복드 칸|8세]]가 집권하자 몽골인들은 신강성 변경 지역인 [[호브도]](현재 몽골의 도시)를 공격해 중국인들을 학살했고 양쩡신은 이 기회에 얄타이 지역의 방어를 강화함으로 자신의 통제권을 확보하고자 했다. 헌데 러시아 제국의 정책에 밀려난 카자흐 족 수만명이 신강성으로 유입되고 1917년 [[러시아 내전]]과 이후 수립된 [[소련]]의 집산화 정책에 반발한 여러 유목민족들과 러시아 백군들이 줄줄이 넘어오면서 신강성은 대혼란에 빠졌다. 1917년 시점에서 3~4만명에 달하는 백군과 러시아인들이 몰려와 중가리아에 정착했으며 이들은 소련에 대한 전쟁을 준비하여 신강성과 소련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양쩡신은 초기에 백군이 신강성 국경을 넘지 못하게 하려 했으나 국경 통제에 실패하자 백군 지도자 안넨코프 장군을 우루무치로 초청하여 구 러시아 제국 조계지에 정착하게 했다. 그리고 기습적으로 안넨코프를 체포하여 소련에 송환하였고 안넨코프는 처형당했다. 그리고 또 다른 백군 지도자 바키치 장군을 처리하기 위해서 소련과 직접적으로 연락, 붉은 군대를 불러들여 [[타르바가타이]]의 바키치 부대를 공격하게 했다. 박살난 바치키는 얄타이로 퇴각했고 붉은 군대의 2차 공격에 패해서 몽골로 달아났다. 백군을 섬멸한 소련 군대는 다시 신강성 바깥으로 철수했다. 한편 신강성은 러시아와의 무역관계가 깊은 곳이었는데 [[러시아 혁명]]으로 루블화가 붕괴되면서 1919년 즈음에는 러시아와의 교역이 완전히 중단되었다. 이 때문에 러시아 제품의 유입이 중단되어 신강성 경제는 큰 타격을 입었다. 이에 양쩡신은 소련과 1920년 중러 이리 임시통상협정을 체결하여 소련과 관계를 진전시켰다. 이때는 중화민국 정부가 아직 러시아 제국만을 인정하고 있을 때였다. 이로부터 소련으로부터 관세 면제, 치외법권 등의 제국 시절 특권을 회수한 양쩡신은 러시아 제품에 대한 관세를 물려 막대한 수입을 올렸고 이는 한때 신강성 재정수입의 23%를 차지하기도 했다. 1924년, 중화민국 정부가 카라한 선언을 계기로 소련과 국교를 맺자 양쩡신은 소련 영사관을 쿨자, 타르바가타이, 우루무치, 카슈가르, 샤라수메에 설치하였으며 정식으로 소련과 국교를 맺었다. 이어 알마아타, 타슈겐트, 세미팔라틴스크, 안디잔, 자이산에 중국 영사관이 설치되었고 1928년 시점에서 신강과 소련의 교역량은 2400만 루블 어치에 달했는데 이는 신강과 중국 내륙의 교역량의 10배에 달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