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양쩡신 (문단 편집) === 신강왕으로서 === 그러던 중 1915년 [[위안스카이]]가 [[홍헌제제]]를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중국에 공화제가 어울리지 않았다고 생각한 양쩡신은 이에 적극 호응하며 위안스카이의 칭제를 지지했고 그 대가로 일등백작에 봉해졌다. 허나 공화제를 지지하던 운남인 관료들이 양쩡신에 맞서 반란을 도모했고 이를 사천성 출신 관료 사문부가 밀고하였다. 그러나 양쩡신은 운남성 관료들을 불러모아 자신이 사문부에게 이러한 밀고를 들었다고 말하면서 자신은 이를 믿지 않는다고 했다. 운남인들이 양쩡신에게 당연히 충성을 맹세하자 양쩡신은 사문부를 처형하여 운남인들을 안심시킨 후 그들의 안전을 위한다는 이유로 운남인 관리들과 그 가족을 도독 관서 내로 이사하게 했다. 1916년 2월, 양쩡신은 이들을 도독 관아에서 열린 정월 대보름 연회에 초대하였다. 몇차례 술잔이 돌자 양쩡신은 병사들에게 신호를 보내 운남인 관료들의 지도자인 마일, 이인, 하정 세 사람의 목을 베게 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식사를 마쳤다. 연회가 끝난 후 양쩡신은 운남강무당 출신 장교 70명을 신강성에서 추방함으로 정권을 돈독히 했다. 그리고 자신의 집권 초창기에 큰 도움을 준 마복흥이 카슈가르에서 위구르족 미녀들을 모아 하렘을 만들고 지역 경제를 바탕으로 사익을 추구하는 등 축재를 하고 공포정치를 일삼아 민심을 동요하게 하자 1924년 2월, 쿠데타를 일으켜 마복흥을 체포한 후 처형했다. 교묘한 수단으로 정적들을 청소한 후 양쩡신의 신강 통치는 괜찮은 편이었다. 그는 위구르족 지도자들 사이의 이해관계를 이용하여 안정적인 기반을 유지하였으며 과거 [[좌종당]]이 박탈했던 위구르인과 키르기스인, 회족 등 무슬림 토착민들의 자치권을 복구했으며 마적을 토벌하고 소련 및 서구열강과 우호적인 관계를 구축하였다. 또한 민족 엘리트들을 후원하고 이들의 지역적 이권을 보장하였으며 투르크계 목축업자, 유목민 족장들, 위구르족 칸들의 전통적인 권리를 옹호하였다. 그리고 카자흐족, 몽골족, 위구르족이 서로 적대하게 하였으며 이들에게 자신이 그들의 보호자라고 생각하게 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