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양쩡신 (문단 편집) === 초기 이력 === 1864년 운남성에서 태어났다. 1889년 과거에 합격해 진사가 되었으며 감숙중위지현(甘肅中衛知縣), 하주지부(河州知府), 감숙제학사(甘肅提學使) 겸 무비학당(武備學堂) 총판(總辦), 신강육군소학당(新疆陸軍小學堂) 총판(總辦), 도련공소(督練公所) 참의관(參議官) 등을 역임했다. 이후 감숙성 영하에서 도대와 지현을 역임했다. 감숙성에도 상당한 숫자의 무슬림들이 살고 있었는데 양쩡신은 이들과 대단히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훗날 신강성에서 지배자가 되는 기반을 쌓게 되었다. 이후 적화도대 겸 제법사에 임명된 양쩡신은 1911년 [[신해혁명]]의 발발로 혁명파와 왕당파로 갈라져 내전이 벌어진 신강성의 성도 디화를 점령함으로 신강성의 지배자가 되었다. 양쩡신은 혁명군과 전 신강순무 위안다화의 싸움을 틈타 유형수인 [[마복흥]]을 포섭하여 그에게 자신에게만 충성하는 2000명의 [[후이족|퉁간]]을 모집하게 했다. 이에 [[위안스카이]]는 양쩡신을 신강도독 겸 포정사로 임명하여 그의 정권을 승인했다. 1912년 6월, 양쩡신은 위구르족 지도자들과 협상하여 이들에게 신강성 연립정부를 수립하게 했고 양짠수, 펑터민 등 기존 실력자들을 각각 카슈가르 제독과 외교사 총장에 임명함으로 신강성의 정치를 안정시켰다. 이후 양쩡신은 3년간 신강성에서 정권 기반을 확립하고 동향인 운남성 사람들을 불러들여 정적들을 차례로 제거했다. 한편 하미의 위구르인들이 신강성의 혼란을 틈타 반란을 일으키자 1913년, 양쩡신은 이수복을 특사로 파견하여 반란군 사령관 티무르와 협상했다. 이수복은 티무르에게 위구르인들이 산악 지역 밖으로 나오면 요역에서 해방시켜주겠다고 쿠란에 대고 맹세했으며 이에 위구르 반란 부대 500여명은 양쩡신에게 투항하여 우루무치를 수비하는 기병부대로 흡수되었다. 투르판의 위구르인들 역시 반란을 일으킨 상태였으나 투르판의 반란 지도자 [[목의등]]도 양쩡신의 회유에 그의 부하로 합류하였다. 허나 양쩡신의 회유는 어디까지나 말 뿐인 회유였고 대접이 좋지 않아 티무르와 목의등은 1913년 9월 다시 반란을 모의하였다가 적발되어 200명의 부하들과 함께 처형당했는데 이에 대해서 양쩡신이 조작한 일이라는 말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