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양제(수) (문단 편집) === [[시해]]와 수나라의 [[멸망]] === 고구려 원정이 처참한 실패로 귀결되자 수나라 내부에서는 반대급부격으로 곳곳에서 반란이 터지면서 내부 분열이 극심해졌다. 고구려 정벌에만 집중해왔던 양제는 이를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다. 양제는 수나라의 수도를 세 곳으로 나누었다. 원래 수도는 '''장안'''으로 서도(西都)라고 칭했고, 동도(東都)인 '''낙양'''을 다시 세웠다. 그리고 장강 이남의 양주에 '''강도'''(江都)를 건설했다. 전국의 거센 반란에도 불구하고 만약 양제가 남아있는 군대를 끌어모아 반란군의 공격에 맞서 제대로 된 방어와 진압 작전을 펼쳤다면 상황을 반전시켜 수 왕조를 유지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양제는 별다른 대응이나 대책 마련은커녕 거의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장강 이남의 강도로 황족들과 함께 피난하여 그곳에서 정사를 돌보지 않은 채 주색에만 몰두했다. 양제는 하루종일 술로 쓸쓸함을 달랬고, 그저 하루하루를 [[주색잡기]]로 소일하며 지냈다. 소황후는 무기력하게 지내는 그에게 기운을 내라고 권했지만, 그는 술에 취해 시간만 낭비했다. 나중에 할 일이 없을 때 양제는 거울을 끌어당겨 멍하니 계속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소황후가 그 이유를 묻자, 양제는 거울을 보면서 "좋은 머리로다. 이 머리를 누가 벨 것인가?"라고 답했다. 때로는 독을 탄 술을 곁에 놓고서, 자신이 총애하는 비빈과 황후에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만일 적이 오면, 네가 먼저 마셔라. 그 다음에는 내가 마시겠다."고 이야기했다. 그러자 소황후는 깜짝 놀라면서 양제에게 어찌 그런 불길한 말을 하느냐고 말했다. 이에 양제는 죽는 것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 같다며 "세상사 무상하고, 인생은 꿈 같으며, 빈천고락이 따로 정해진 것도 아니니 목이 잘린들 무슨 상관일고!"라며 씁쓸하게 웃었다고 한다. 남도 강도에는 자신과 손자인 연왕(燕王) [[양담]](倓)이 있고, 제1수도인 서도 장안에는 손자인 대왕(代王) 양유(侑), 제2수도인 동도 낙양에는 월왕(越王) 양동(侗)[* '동'이라고도 읽고, '통'이라고도 읽는데, '통'에는 부정적인 뜻도 있으므로 '동'이 맞을 것이다. 기본음도 '동'이고 '통'은 예외음이다.]을 주재시켰다. 이 조치는 수도 세 곳에 자신과 손자 셋으로 하여금 각각 웅거함으로써 전화가 거세져 수나라가 통일제국은 유지하지 못하더라도 최소 한 곳은 남아 있기를 바랐던 것에서 나온 묘책이었다. 하지만 양유와 양동 둘 다 어린애라 잘 지킬 리가 없었고, 장안에는 양제의 이종사촌형인 [[고조(당)|이연]]과 [[태종(당)|이세민]] 부자가 태원으로부터 남진하여 입성했으며, 낙양에는 관료였던 [[왕세충]]이 입성했다. 이연 부자와 왕세충은 각각 양유와 양동을 옹립했지만 둘 다 [[허수아비]]였고 실권은 그들이 쥐게 되었다. 심각한 점은 이렇게 기존 수도인 장안은 그냥 방치 상태가 되고, 양제가 피난간 곳에 정부 요인들이 같이 가지도 않았으므로 사실상 수나라의 중앙정부가 활동을 멈추었고, 그 덕분에 반란은 120여 건이나 발생했다는 것이다. 그래도 양제는 정신을 못차리다가 평소 양제의 처우에 불만을 품은 근위대장 [[우문화급]], [[우문지급]] 형제에 의해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때 우문화급의 난을 양제가 가장 아끼던 장손 양담이 사전에 탐지해 양제에게 상주하려 했으나, 궁궐을 담당하는 자에 가로막혀 뜻을 이루지 못했다. 반란군 수장들은 양제가 무지막지한 [[폭군]]이고, 병사들도 그를 증오한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만약에라도 그냥 반란을 일으켰을 때 병사들이 지지하지 않아서 실패할 가능성도 염려하고 있었기 때문에 병사들의 지지를 얻어내기 위하여 유언비어를 퍼트렸다. >'양제가 독주를 만들고 있으며, 그 독주를 이용하여 반란을 기도하는 친위병들을 모조리 죽이고, 남방의 병사를 중용하여 친위병들이 북쪽으로 돌아갈 희망을 끊어버리려 한다.' 이러한 유언비어를 듣게 된 병사들은 양제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서로 연락을 주고 받으며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심했다. 정변이 일어나고, 병사들이 안팎에서 호응했기 때문에 양제는 저항할 틈조차 없었다. 이때 반란의 소식을 처음 들은 양제는 미워하던 차남 [[양간]]이 반란을 일으켰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평소 이런 아버지를 두려워하던 양간은 반대로 아버지가 자신을 잡으려고 군대를 보냈다고 생각했다. 양제는 살해당하기 직전, 황제는 황제라고 마지막 위엄을 보였다. 반란군이 궁전으로 들어닥치자 인상을 쓰면서 호통쳤다. >수양제: '''"짐이 무슨 죄가 있길래, 목이 잘리지 않으면 안 되는 지경에 이르렀는가?"''' > >반장 마문거(馬文擧): "당신은 호화사치의 극을 달리면서 허구한 날 이곳 저곳을 놀러다니고 토목공사를 일으켜 백성의 힘을 함부로 낭비했다. 그리고 계속된 무리한 정복전쟁으로 국가의 재정이 파탄났으며, [[주색잡기]]에 소일했고, 이로 인해 온 천하의 백성들이 당신 때문에 죽어가고 있다. 당신의 죄악은 하늘을 채우고도 남으니 100번 죽어 마땅하다. '''어찌 감히 스스로 죄가 없다고 하는가?'''" > >수양제: (탄식하면서) "그렇다. 짐은 정말 백성들에게 잘못했다. 그러나 너희들은 뭘 했느냐? 하루종일 나를 따라서 잘먹고 잘살며 부귀영화를 누리지 않았느냐? 너희는 모두 내가 먹여살렸던 군인들이다. '''어찌 반란군들과 같이 놀 수 있단 말이냐?[* 그러자 그 자리에 있었던 몇몇 군인들이 부끄러움을 느껴 얼굴이 빨개졌다고 한다.] 그러니 묻겠다. 주동자가 누구냐?"''' > >사마덕감: (코웃음을 치면서) "지금 천하는 도탄에 빠졌고, 하늘과 땅에 모두 원성이 자자하다. 세상 사람들은 네놈 같은 우매한 폭군을 뼈에 사무치게 증오하고 있는데, '''어찌 주동자가 한 사람 뿐이겠는가? 이제 세상의 분노를 풀기 위해서는 오로지 네놈의 수급으로 천하에 사죄하는 방법밖에는 없다."''' 사마덕감은 말을 끝내고 양제를 누각에서 끌어내렸다. 이때 우문화급의 사자가 달려와 "이런 우매한 황제는 내게 데려올 필요도 없으니 즉시 그를 해치워라."고 명령을 내리자 사마덕감은 양제를 죽이려고 검을 빼들었다.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13살된 양제의 어린 아들인 조왕(趙王) 양고(楊杲)가 울먹거리자, 반란군들은 양고를 한 칼에 죽여버렸고, 피가 양제의 몸에까지 뿌려졌다. 이 참혹한 광경을 보고, 양제는 이제 더 이상 살 수 없음을 알고, 할 수 없이 반란군 장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천자는 천자로서 죽는 방법이 있다. 천자가 죽을 때는 칼을 써서는 안 된다.''' 독주를 가져와라, 짐이 스스로 독주를 마시고 자진하겠다!"[* 공교롭게도 양제가 문제 양견과 형 양용을 살해할 때의 상황과 비슷하다. 황제답게 죽게 해달라는 요청이 거절당하는 것까지 판박이다.] 그러나 반란군은 "'''지금 이 판국에 황제가 어디 있고, 천자가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독주를 마시고 죽는 것은 칼로 죽는 것보다 편하니 허용하지 않겠다."라면서 허락하지 않자, 양제는 "어쨌든 짐이 천자였으니 짐의 시신만은 건드리지 말아다오."[* 시신이 온존해야 좋다는 동아시아 관념상 교살을 참수보다 높게 쳤다.]라고 울면서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의 허리띠를 풀어서 교살해 달라고 했고, 반란군들도 이는 받아들여 내실로 끌고 들어가 허리띠로 즉석 교수대를 만든 뒤 양제를 [[교살]]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형 양용을 죽인 방식 그대로 최후를 맞이했다. 게다가 양제를 죽인 반란 세력들 중에는 양제의 사돈이자 부하였으며 그 형 양용을 죽이는 일의 실행을 도맡은 [[우문지급]]이 있었다. 어찌보면 자기가 뿌린대로 거둔 셈이었다.] 이때 수 황실인 홍농 양씨 일족은 우문지급과 친한 양제의 조카 [[양호(수)|양호]]를 제외하고 모두 목숨을 잃는 비운을 맞았다. 양제의 시신은 대중에게 공개된 다음 오공대 인근에 묻혔다가, 훗날 양제의 이종사촌인 [[고조(당)|당고조 이연]][* 수양제 양광의 어머니 문헌황후 독고가라와 당고조 이연의 어머니 원정황후 독고씨는 친자매 사이였다.]에 의해 뇌당으로 이장되었다. 그리고 648년 [[태종(당)|당태종 이세민]]은 수양제의 황후였던 양민황후 소씨가 사망하자 그녀의 유해를 강도로 보내 수양제와 합장하도록 명령했다. 그래서 학자들은 양제묘 동쪽의 또 다른 묘의 묘주는 양민황후 소씨로 추정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