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양저우시 (문단 편집) == 역사 == [[파일:중국 양저우 둥관.jpg|width=800]] 도심 서부의 구도심인 둥관 역사 거리 [[후한]] 대에 광릉현이라 불리었으며 동명의 군([[서주]] 광릉군)의 치소도 당연히 이곳에 있었다. 그러나 한나라가 쪼개지고 [[삼국시대(중국)|삼국시대]]가 되어 이 지역이 [[위나라]]와 [[오나라]] 사이의 최전방이 되자 위나라는 광릉군의 치소를 [[화이안시]] 일대로 옮겨버렸다. [[수나라]] 대에 [[양주(중국)|양주]]를 재설치하고 치소를 이곳에 두었는데 지금의 양저우라는 이름이 여기서 비롯되었다. 후에 [[대운하]]가 양주 옆에 건설되자 '''[[양쯔강]]과 [[대운하]]가 교차하는 환상적인 위치 조건'''이 갖추어져 엄청난 번영을 이루었다. [[강도]](江都)로 불리며 남쪽의 부수도가 되었고 [[수양제]]가 수서호를 세워 즐겨 찾았으며, 마지막에는 결국 이곳으로 피신했다가 암살되었다. [[당나라]] 대에는 아시아 각지에서 온 상인들이 [[광저우]]나 [[하노이]] 등에 내려서 올려보낸 제품, [[사천]]에서 보내온 비단 등이 대운하를 통해 화북으로 보내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집결하는 물류의 허브가 되었다. 그렇기에 환전업, 금융업도 번영하고, 큰 [[신라방]]과 [[페르시아]], [[아랍]] 상인의 무역거점인 번방(蕃坊)이 존재하던 국제적인 상업도시였다. 당나라 대에는 사람들 사이에서 양주에서 죽는 것이 소원이라는 말이 돌았을 정도. 양저우에서 시안으로 보내던 물품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소금과 곡물이었는데, [[황하]] 유역의 지력이 다해 늘어나는 화북의 인구를 먹여살릴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양저우는 당나라의 식량 안보를 책임지는 최중요지가 되었다. 그러나 8세기~9세기 동안 전신공, 필사탁, 손유 같은 반란군 우두머리들이 양저우를 뻑하면 털어대고 상인들을 학살했고, 마지막으로는 10세기에 [[후주]]의 침략을 받으면서 도시가 결국 몰락하고 만다. 결국 [[송나라]] 대에는 시인들이 양주의 적막한 풍경을 노래할 정도가 되고 말았다. 수운 교통의 최중요지 역할도 인근의 [[쑤저우]], [[항저우]] 등에 넘겨주었다. 그러나 [[금나라]]의 남침으로 송 조정이 피신하였을 시에 임시 수도로 삼아질 만큼 여전히 요충지로 대접받고 있었으며(1128 ~ 1129년), [[동방견문록]]에 의하면 [[마르코 폴로]]가 양저우의 행정관이 되었다고 한다. 원명 대에 도시는 소금 유통의 중심지로 다시 번영하였다. 하지만 [[명청교체기]] ([[남명]]) 시기 병부상서, 예부상서를 지낸 사가법(史可法)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청나라]] 군대에 함락된 후 [[양주십일|수만명이 학살되는 피해]][* 80만명이 학살당했다는 주장도 있기는 하지만 이건 과장되었다는 의견도 있다.]를 입었다. 이후 강 건너 [[전장시|전장]]과 동쪽의 [[난퉁시|난퉁]]이 번영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