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양자경 (문단 편집) === 1990년대 === 홍콩영화의 정점기인 1980년대 후반에는 결혼 때문에 활동이 없었지만, 1992년에 이혼하고 영화계로 복귀했다.[* 당시 홍콩보도에 의하면 양자경은 3000만 홍콩달러의 위자료를 받았다고 한다.] 사실 양자경은 홍콩영화의 최정점기인 1980년대 중후반에는 결혼 때문에 은퇴하여 그다지 활동이 없었지만, 이혼 후 1990년대 중반에 여러 사극성 무협물에 출연함으로서 더 알려지게 된다. 다만 이 당시는 이미 홍콩영화의 쇠퇴기였기 때문에, 한국에는 이 시기의 양자경 출연작들은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폴리스 스토리 3와 태극권(원제 <태극장삼풍>) 정도만이 제대로 극장에서 개봉되었고, 나머지 작품들은 기껏해야 비디오로 소개된 정도이다. 결혼 후 복귀작으로 성룡과 함께 [[폴리스 스토리 3]]에 출연했다. 이 영화는 조국인 말레이시아에서 후반부를 촬영했다. 여기서 무슬림 히잡을 쓰고 말레이어를 잠깐 구사한다. 이후 <동방삼협>[* [[매염방]], [[장만옥]]도 출연한 영화다. 특히 매염방과는 이 영화를 비롯한 여러 영화에 함께 출연하면서 매우 친한 사이가 되어서 매염방이 40세에 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돈독한 우정을 나누었다.]과 [[태극권(영화)|태극권]] 등 액션영화에 주로 출연하며 인지도를 높이게 된다. 그외 영춘권의 창시자 엄영춘의 생애를 다룬 [[영춘권]] (원제 <영춘(《詠春》)>)이란 영화도 출연했다. 1980년대 말 홍콩영화의 정점기에 홍콩 톱스타들은 1년에 10편 가까이 영화에 출연하고 있었는데, 양자경이 이때 은퇴한 것은 이후 커리어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때 다작 출연을 남발한 홍콩배우들은 이미지 소비로 이후 커리어가 거의 사그라들었다. 대표적으로 양자경을 대신해 여자 액션스타를 하던 [[호혜중]]은 여러 아류작에 출연했다가 1990년대 초반 이후 아예 배우를 그만두었다. 사실 복귀 직후에도 이런 경향이 남아 있어서 양자경은 복귀하자마자 1993년 6편, 1994년 3편이나 되는 영화에 출연해서 호혜중과 마찬가지로 이미지, 체력[* 그 당시 매년 4-5편씩 출연했던 [[이연걸]]은 골병이 들어서 2010년대부터는 활동이 격감했고, 갑상선 이상으로 노화에 시달리고 있다.] 및 정신력 소모로 번아웃될 뻔 했으나, 1990년대 중반 여러가지 이유로 메이저 홍콩영화사들이 도산하면서 홍콩영화의 제작편수가 격감했고, 스스로의 판단이라기보다는 홍콩 영화 제작환경의 변화로 이 운명을 피해갔다. 그리하여 1990년대 중반부터는 1년에 한두편만 출연하고 있다. 양자경은 홍콩 영화의 전성기에는 주로 아시아권에서만 유명했는데, 1997년 [[007 시리즈]]의 [[네버 다이|007 네버다이]]에서 [[본드걸]]로 출연하게 된다.[* 동양인 본드걸로는 007 [[두번 산다]]에 이어 두번째. [[본드걸]] 문서 참조.] '네버다이'에서 양자경은 '붙잡힌 히로인'에 그쳤던 이전의 본드걸들과는 달리, 중국 공작원으로 등장해 본드 이상의 액션과 격투 임무를 선보이며 동등한 협력자로서의 역할을 훌륭히 소화하여 본드걸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는 호평을 받았다. 이 영화를 통해 아시아권 밖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1997년 피플지가 선정한 '가장 아름다운 50인' 중의 한 사람으로 뽑히기도 했다. 이때 [[https://www.youtube.com/watch?v=GnsJ-HBJw-o|데이비드 레터맨 쇼]] 등 미국의 여러 예능 프로그램이나 토크쇼에 출연해 유창한 영어를 선보였는데, 이 때문에 동양인이 안착하기 매우 힘들었던 할리우드에 무리없이 입성할 수 있었다. 영화배우 데뷔후 10년이 넘은 1990년대 중반부터는 연기력을 인정받아 액션배역 뿐만 아니라 진지한 연기를 하는 정극배역으로도 출연하기 시작했다. 현대사의 유명한 인물을 소재로 하는 전기영화나 멜로 영화에도 종종 출연했다. 1997년에 <송가황조>[* [[중국]] 현대사에서 상당한 권력과 재력을 행사한 송씨 집안 세 딸들의 이야기. 첫째딸 [[송애령]](쑹아이링)은 [[중국]] 중앙은행 총재인 쿵샹시(공상희)와 결혼했고, 둘째딸 송경령([[쑹칭링]])은 [[쑨원]](손문)과 결혼했고 셋째딸 송미령([[쑹메이링]])은 [[장제스]](장개석)와 결혼한 집안이다. 아들인 송자문은 국민당의 핵심 인물이자 [[중국]]의 4대 재벌 중 한 사람이다. 그래서 우스갯소리로 첫째는 돈을 사랑했고, 둘째는 [[인민]]을 사랑했으며, 셋째는 [[권력]]을 사랑했더라라고 하기도 한다.]에서 송씨 집안의 큰딸 송애령으로 출연했다. 이후에 2012년에는 [[뤽 베송]]이 감독한 영화 <더 레이디>에서 [[미얀마]]의 [[민주화]] 운동가 [[아웅산 수치]]로 출연해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이 영화를 위해 아웅산 수치와 만나 친분을 쌓기도 했는데, 아직 미얀마가 군사정권하에 있던 시절이라 미얀마 정부에게 찍혀 입국금지 명단에 오르게 되었다. 그래서 미얀마 공항에 도착하고도 입국이 불허되어 다시 되돌아가야 하는 일을 겪기도 했다.][* 깡마른 아웅산 수치와 비슷하게 보이려고 5Kg을 감량했는데, 원래도 상당히 마른 몸매인데다가 오랜 기간 발레 및 운동을 해서 전신이 잔근육인 상태라 더 뺄 살이 없는데도 빼느라 고생했다고 한다. 영화 촬영 전에 아웅산 수치에 대해 알기 위해 아웅산 수치의 둘째 아들을 만났다가 "우리 어머니는 당신보다 더 마르셨어요." 라는 말을 듣고 살을 뺐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