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양위팅 (문단 편집) === 최후 === 결국 1929년 1월 10일, 그의 세력을 경계한 장쉐량이 구파의 지지도 이끌어낼겸, 과거 궈쑹링 휘하에 있던 육대파의 주요 장령인 가오지이(高紀毅, 고기의), 왕이쩌(王以哲, 왕이철), 류도췐(劉多荃, 유다전), 탄하이(譚海, 담해) 등을 소집하여 양위팅과 창인화이를 제거하기 위한 회의를 열었고 양위팅과 창인화이를 자신의 관저로 불러들인 후 이들과 잠시 얘기를 나누었다. 양위팅과 창인화이는 중동철로를 소련으로부터 회수하고 독판공서를 설치하자고 제안했는데 이들의 제안을 듣던 장쉐량은 갑자기 복병을 풀어 양위팅과 창인화이를 체포하였다. 가오지이가 양위팅과 창인화이의 죄상을 선포한 이후 탄하이가 몇사람의 부관을 대동하여 양위팅, 창인화이를 끌어낸 후 신형률 101조 제1항 내란죄 및 수정군법 제27조 제7항 반란죄를 적용하여 내란죄, 역치에 반대한 죄[* 물론 위에서 보았듯이 양위팅은 역치에 찬성하는 인물이었고 역치에 대한 양위팅의 입장은 장쉐량의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를 물어 총살했다. 이후 임시고등군법회의의 판결문은 양위팅이 [[중국 공산당]]과 결탁하여 폭동을 일으키려 했다고 지적했지만 증거가 없다. 양위팅이 반란을 일으키려 해서 죽였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양위팅이 죽은 이후에 나온 말로 정작 양위팅 사망 직후에는 남북통일에 반대하고 경봉차량의 압수와 군비 축소 계획에 반대한 일 등만을 언급하고 있다. 양위팅이 죽은 후 왕가정이 장쉐량에게 신중치 못한 일이었다고 지적하자 장쉐량은 이미 끝난 일을 가지고 그만 말하라고 크게 화를 냈으며 "이후 우리들이 잘하지 못한다면 진실로 지하에 있는 양위팅과 창인화이에게 죄송한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죄책감을 드러냈다. 이런 정황을 말미암을 때 양위팅의 죽음은 그가 정말로 정변을 일으켜서 죽었다기 보다는 장쉐량의 입지에 위협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