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양위팅 (문단 편집) === [[동북역치]] === 1928년 6월 4일, 베이징 함락 직전에 [[황고둔 사건]]으로 장쭤린이 사망 후 장쉐량, 장쭤샹과 더불어 봉천군벌의 군정대권을 계승할만한 유력한 인물로 손꼽혔다. 하지만 만주 구파가 ([[궈쑹링]]의 제자이며 양위팅과 사이가 좋지 않던) [[장쉐량]]의 승계를 지지하면서 장쉐량이 6월 19일 정식으로 봉천독판에 취임하고 6월 21일 정식으로 장쭤린의 사망을 발표했다. 6월 24일 동삼성 연합의회는 만주구파의 수장인 장쭤샹을 동삼성보안총사령 겸 길림성 사령에 추대했지만 장쭤샹은 이를 거절하고 장쉐량을 지지하여 7월 3일 장쉐량이 동삼성보안총사령에 추대되어 당일 취임했다. 만주 구파는 양위팅이 장쭤린을 부추겨 보경안민 노선을 버리고 관내진출을 일으켰기 때문에 [[국민정부]]와 전쟁을 하게 되었으며 4방면군 대리였던 양위팅이 경한선 작전에 실패했기 때문에 장쭤린이 사망한 것이라면서 양위팅에게 장쭤린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지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국민정부와의 합류로 가닥을 잡고 있던 장쉐량에게는 자신의 집권을 지지하는 것은 만주 구파지만 동북역치에 관해서 입장을 같이 하는 것은 양위팅이었기 때문에 둘 중 한명을 택일하기 어려운 입장이었다. 옌시산은 양위팅에게 역치를 권했으나 양위팅은 펑위샹을 토벌한 이후에 역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대세에 따른 역치에 대한 찬성을 표했다. >"동삼성에 [[청천백일만지홍기|청천백일기]]를 게양하는 것은 故 [[장쭤린]]이 반대해온 것이다. 나 개인의 입장에서도 반대하였다. 그렇지만 이제 장쭤린이 있던 당시와 사태를 달리한다. 새로운 것을 취하지 않을 수 없다. 민중은 모두 화평을 요구한다. 그리고 청천백일기의 게양에 의해서 평화를 기약할 수 있는 것은 대세이다. 어쩔 수 없이 청천백일기를 게양하지만 동삼성 정치에 남방인을 끌어들이는 것은 아니다. 남방화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위해서 타협을 요하는 것이고, 타협을 위해서는 기를 바꾸어 다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에 진실로 어쩔 수 없는 형편이다. 그리고 이는 단지 평화를 요구하는 민의에 따르는 것일 뿐이다." 이후 관내에서 봉천에 복귀한 장쉐량이 3-4 방면군단 개편에 착수하자 부군장에 임명되었고 동삼성정무위원회가 구성되어 동북삼성의 최고 정치행정기구로 자리잡자 양위팅은 [[장쭤샹]], [[탕위린]], [[장징후이]], 완푸린, 창인화이(상음괴) 등과 함께 정무위원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정무위원회는 어디까지나 만주의 실력자들의 연합체에 불과하지 실질적인 행정기구로서 작동하진 못했고 양위팅은 자신이 실제 결정 과정에서 구파와 장쉐량의 연합 때문에 배제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정무위원회 참여를 거부하고 장쉐량의 섭정을 자처하며 장쉐량의 인사 행정에 사사건건 개입하며 장쉐량을 업신여기는 태도를 보였고 이 때문에 장쉐량과 양위팅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거기에 장제스는 8월 25일, 양위팅과 [[바이충시]]가 회담했을 때 바이충시가 양위팅을 부추겨 장쉐량을 몰아내라고 교사했다는 정보를 제공하며 장쉐량과의 합작을 추구했다.[* 하지만 양위팅이 정변을 꾀하려 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장제스의 주장이고 실제로는 [[계계군벌]]과 단순히 정치적 연대 정도를 시도한 것을 장제스가 장쉐량의 관심을 끌기 위해 침소봉대했을 가능성이 높다.] 1928년 [[계계군벌]] [[바이충시]]와 연합하여 자유행동을 선언하고 반란을 일으킨 [[장쭝창]]의 직로연군 부대를 토벌하기 위해 열하로 출병했고 1928년 10월 8일 장쉐량이 국민정부위원으로 임명되자 장쉐량이 자신의 위치를 흔들 것을 우려하여 자신이 봉천에 돌아갈 때까지 결정을 미뤄달라고 요구하며 반발을 표했고 이 때문에 장쉐량은 10월 12일 국민정부위원 직에 취임하지 않겠다는 뜻을 전했다. 한편 양위팅을 싫어했던 [[일본 제국]]은 계속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고사를 들먹이는 한편 만철부속지 경찰서와 일본 특무기관에서 수집한 양위팅과 창인화이에 대한 정보를 넘겨주며 양위팅에 대한 장쉐량의 경계심을 부추겼다. 양위팅은 청운항공관에서 연일 연회를 베풀며 군인, 정객을 모아 위세를 과시하곤 했는데 이는 장쉐량에게 몹시 위협적인 제스처로 다가왔다. 특히 양위팅의 아버지의 칠순잔치 때는 각성의 사람들이 모여 문전성시를 이루었는데 마치 양위팅이 만주의 주인인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이후 장쉐량은 이때의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린췐주(林權助, 임권조)가 도쿄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한 것이 일본의 역사에서 도쿠가와 막부시대의 사실에 관계된 것을 보고, 당시 동북의 정치상황과 연상되어 나는 몹시 불안을 느꼈다. 게다가 양위팅은 당시 비록 어떤 직무도 없었지만, 동북 군정요인이 그의 문하에 몰려 비위 맞추기에 바쁘고, 심지어 국내의 각성 군정대표가 심양에 오면 모두 그를 방문했다. (...) 나는 그의 부친 축하연에 참가했지만, 만약 양위팅, 창인화이가 취이대지(取而代之)하려 한다면 전혀 피를 흘리지 않고도 동북정권을 장악할 수 있고, 임권조가 말한 것은 바로 이러한 정황을 말한 것이겠구나. (...) 나는 히데요리가 도쿠가와에게 살해당했던 것과 달리 내가 먼저 그를 제거해버릴까라고 끊임없이 생각했다. (...) 그후 이를 결정하기 위해 은화로 점을 쳤고, (...) 결국 먼저 그를 제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양위팅, 창인화이 두 사람의 당시 정황으로 나는 정신상으로 지극히 큰 위협을 느꼈고, 이때 제거하지 않으면 반드시 후환이 배태될 것이라고 생각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