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양세봉 (문단 편집) === 국민부 및 조선혁명당 장교 활동 === 1929년 4월 정의부를 주축으로 신민부 민정위원회측 대표 이교원과 참의부측 심용준이 모여 새로운 군정부인 국민부를 조직하였다. 이때 양세봉은 '''제1중대장'''으로 임명되어 활약하였으며 국민부 산하 선민부토벌 지휘부(鮮民府討伐指揮府)를 조직하고 지휘부의 부사령이 되어 총사령 [[이준식(군인)|이웅]](李雄)[* 6.25 전쟁 당시 육군사관학교 교장, 3사단장으로 영덕 전투에서 북한군을 막아낸 이준식의 가명이다.]과 함께 일제의 주구 기관인 '''선민부(鮮民府)를 토벌'''하는 것을 주 임무로 하여 일제 기관을 습격하고 일제 밀정 등을 처단하는데 앞장섰다. 1929년 12월 국민부 중앙 회의에서 민족유일당 조직동맹을 [[조선혁명당]]으로 개편함과 동시에 그에 소속되어 있던 혁명군을 독립시켜 국민부 예하 조직으로서 무장 단체인 [[조선 혁명군]]을 조직하여 종전의 정의부에 소속되어 있던 부대를 개편하고 참의부와 신민부에 있던 일부 병력을 흡수하여 통합시켰다. 양세봉은 '''부사령'''이라는 중책을 맡아 적 기관 습격 및 밀정 처단 등 무장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1930년 8월 조선혁명당 대표자 회의가 개최되었을 때 조선혁명당은 국민부를 지지하는 [[민족주의]]와 이를 부정하는 [[사회주의]] 계열로 분열되고 있었다. 양세봉을 비롯하여 현익철(玄益哲), 고이허(高而虛), [[김문학]](金文學), 양하산(梁荷山)(본명 梁基瑕) 등 민족주의 이사들은 국민부를 적극 지지하고 당의 위원회에서 결정한 사항의 실행을 주장한 반면 고활신, 김석하(金錫夏), 이웅(李雄), 현정경, [[이성근]](李成根) 등은 이에 반대하여 국민부 및 조선혁명당을 해체하고 군대를 적위군(赤衛軍)에 편성하고 [[농민]]은 농민 협회를 조직하여 유력한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31년 9월 18일 일제가 중국 동북 지방을 침략한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한국과 중국의 연대 투쟁의 필요성이 절실하여 양세봉은 1931년 11월 신빈현 왕청문(旺淸門)에서 중국인 왕동헌(王彤軒)의 요녕농민자위단(遼寧農民自衛團)과 협의하여 '''연합 부대를 편성'''하였고 양세봉은 조선혁명당 집행위원에 선출되어 국민부와 조선혁명당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였다. 1932년 1월 조선혁명당과 조선혁명군의 주요 간부들은 중국 신빈현(新濱縣) 하북(河北)에 있는 서세명(徐世明)의 집에서 중앙 간부 회의를 소집하여 9․18 사변 이후 당면한 현안 문제를 논의하던 중 친일 주구 단체인 '보민회'의 밀고를 받고 출동한 통화 일본영사 분관 경찰의 습격을 받아 조선혁명당 중앙집행위원장 [[이호원]](李浩源), 조선혁명군 사령관 김보안(金輔安), 부사령 [[장세용]], 부관장 박치화, 경위대 대장 [[이규성]](李奎星), 국민부 공안부 집행위원장 [[이종건]] 등 10여 명이 체포되었고 3월 초까지 계속된 일경의 검거로 9개 현에서 간부 83명이 체포되는 등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양세봉을 비롯하여 [[양기하]], 고이허 등 조선혁명당의 중견 간부들은 조혁군 각지부대 수뇌회의(朝革軍各地部首腦會議)를 소집하고 위기에 처한 조선혁명군과 조선혁명당의 자구책을 토의한 후 조직을 재정비하였는데 이때 양세봉은 '''조선혁명군 총사령관'''에 선임되었다. 총사령에 임명된 양세봉은 일제와의 [[결전]]을 수행하기 위하여 군의 조직을 5개사로 개편하여 제1사령에 [[박대호]](朴大浩), 제2사령에 한검추(韓劍秋), 제3사령에 조화선(趙化善), 제4사령에 최운구(崔允龜), 제5사령에 정광배(鄭光培)를 임명하였으며 총사령 본부를 홍경현 왕청문에 재설치하고 정의부에서 세운 화흥중학(化興中學)을 속성사관학교로 개편하여 조선혁명군 관할하에 귀속시키는 동시에 강전자(江甸子)로 옮겼다. 속성사관학교의 [[교장]]에 양하산(梁荷山), 총대장에 윤일파(尹一波), 교관에 한국신(韓國信) 등을 임명하고 양세봉은 [[명예]] 교장으로 독립군을 양성하여 항일 역량을 높이는데 진력하였으며 밖으로는 중국 의용군 총사령 이춘윤(李春潤)과 협의하여 요녕민중자위군(遼寧民衆自衛軍)을 조직하는 [[협정]]을 체결한 후 조선혁명군은 특무대와 선전대대로 편성하여 양세봉이 요녕민중자위군의 특무대 사령으로 김광옥은 선전대대장으로 활동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