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양보청 (문단 편집) === 태평천국 운동 후반 === 태평천국군은 남경의 포위가 해제되자 1860년 여름부터 [[강소성]], [[절강성]]으로 주력군을 동진시켰다. 이 틈을 탄 [[증국번]], 호북순무(湖北巡撫) 호림익(胡林翼)은 약 5만의 군대를 이끌고 [[호북성]]에서 [[안휘성]]으로 침범했는데 주요 목표는 태평천국의 거점이자 서대문이라 할 수 있는 [[안칭|안경]]이었다. 수사제독(水師提督) 양재복(楊載福)과 증국번의 동생인 증국전(曾國荃)은 각각 수군 4000명과 육군 5만 명을 이끌고 안경으로 육박했는데 부도통(副都統) 다륭아(多隆阿), 안찰사(按察使) 이속의(李續宜)는 2만명의 기마병과 보조병을 이끌고 지원했다. 안경은 태평천국군의 주요 도시로서 남경의 서쪽에 위치해 서대문의 역할을 하며 교통의 중심지였다. 중요성을 잘 알고 있던 태평천국군은 분전했지만 청나라군을 당해내지 못하고 6월 20일부터 안경은 포위됐다. [[홍수전]]은 9월 하순에 장수들을 집합시켜서 [[위위구조]]의 계략으로 안경의 포위를 풀기로 하는데 양보청은 황문금과 함께 [[장강]] 남안을 따라 진격하여 [[강서성]] 북면을 공략하러 출발했다. 유관방이 기문(祁门)에 있는 [[증국번]]을 공격했지만 실패하자 근처에서 견제하던 양보청은 1861년 7월 하순부터 [[진옥성]]과 함께 안경을 직접 공격하기 시작했다. [[진옥성]]은 이수성과 약속하여 [[위위구조]]의 계략으로 [[무창]]을 공격한 후 안경의 포위를 풀기로 했지만 이수성이 시일을 어겨서 어그러진 탓에 몇 번 실패한 후 양보청을 부른 것이었다. 양보청은 진옥성의 요청에 응하여 8월 6일에 안경 서쪽의 태호(太湖)[* 현재 [[안휘성]] 타이후현(太湖県)][* [[강소성]]에 있는 태호(太湖)와는 다른 곳]에 이르렀고 8월 7일부터는 동진하여 안경 북편에 있는 괘차하(掛車河)에 도착했다. 이곳은 다륭아가 지키고 있었는데 괘차하 바로 위에 있는 동성(桐城)[* 현재 퉁청(桐城) 시]에 머무르던 임소장(林紹璋), 황문금, 오여효는 양보청과 연합하여 다륭아를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그러자 21일부터 24일간 양보청은 진옥성과 함께 안경 북편에 바로 붙어있는 집현관(集賢關)에 5만 여명의 군대를 이끌고 진입했고 안경 안에 있던 수비군 2만 명도 성의 서문에서 대기하며 협공을 노렸다. 25일부터 28일까지 양보청과 진옥성은 안경을 포위하던 [[청나라]] 군대를 10여 차례나 맹공했는데 주요 목표는 [[참호]]였다. 당시 청나라군은 이중 참호를 파서 한 곳은 성의 보급을 차단하고 다른 쪽은 외부의 지원군을 막는 형세였다. 양보청과 진옥성은 참호를 메우기 위하여 전투를 진행함과 동시에 병사들에게 풀을 짊어지고 가서 참호에 던져 넣도록 했다. 막대한 사상자가 나왔지만 태평천국군은 청나라의 맹공을 받으면서도 참호를 메우기 시작하여 쓰러진 시체와 풀들로 참호를 메웠다. 또한 성 내의 수비 책임자인 평서주장 오정채 역시 서문을 열고 나와 맹공을 퍼부었다. 하지만 [[독전대]]까지 운영하며 맞서는 [[증국번]]의 지휘 아래 공격은 실패했다. 28일부터 9월 2일까지 다시 태평천국군은 공격을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안경성 밖의 들판은 시체가 가득차고 주변의 강들은 피로 붉게 물들 정도였다. 성안의 병사들은 보급이 끊겨서 화력이 부족했고 또한 굶고 있었는데 이에 청나라군은 9월 4일밤 안경성 주변의 마산(馬山) 밑에 땅굴을 만들었고 9월 5일 오전 8시 경에 폭파하여 성벽을 무너뜨리고 성을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성을 지키던 오정채, 엽운래, 장조작 등의 장수와 병사 만 여명이 결사항전 하다가 사망했다. 성 안에서는 3일간 학살과 약탈이 벌어졌다. 9월 6일에 성이 함락된 것을 확인한 양보청과 진옥성은 [[분노]]를 삼키며 퇴각을 시작했는데 집현관(集賢關)을 빠져나와 동성(桐城)으로 탈출을 기도했다. 하지만 다륭아가 이끄는 부대는 왕교두(王橋頭)에서 나와 양보청, 진옥성의 측면을 공격하여 큰 피해를 안기니 오히려 9월 7일에 동성을 잃었다. 10월경에 안경 서남쪽의 랍수과(蜡树窠)까지 후퇴했지만 재차 다륭아는 공격해 진옥성은 태호(太湖)로 물러나 [[호북성]]으로 진출하고자 했다. 이는 [[샹양|양양]], 덕안(德安)[* 현재 더안현(德安县)]으로 물러나 군대를 다시 모으고자 함이었는데 부하들의 반대로 진옥성은 산을 넘어 육안(六安)[* 현재 루안(六安) 시]으로 갔다가 [[합비]]로 후퇴했다. 양보청은 9월 7일에 동성을 잃자 부대를 인솔하여 [[안휘성]] 남쪽으로 후퇴했다. 1862년 5월 안휘성 영곽(宁郭)[* 현재 쉬안청(宣城) 시]을 잃자 양보청은 [[강소성]]으로 후퇴했고 다른 태평천국군들 역시 속절 없이 밀리며 5월에는 남경 부근의 우화대까지 청군은 진입했다. [[홍수전]]의 명령에 따라 남경을 지키기 위해 남경 남쪽 외곽의 고교문을 지키던 양보청은 9월에 고교문을 잃었고 고순(高淳)으로 후퇴했다. 1864년 봄, 양보청은 황문금, 이원계(李远继)와 함께 [[절강성]] 북부의 호주(湖州)[* 현재의 후저우(湖州) 시]의 수비를 맡았고 호왈 수십만의 군대를 이끌고 있었다. 하지만 같은해 7월 19일 남경은 함락 됐다. 그러자 양보청은 호주를 황문금에게 맡긴 후 [[삭발]]하여 위장한 후 [[상하이]]로 홀로 향했다. 그 후, [[절강성]], [[복건성]], [[마카오]] 등지를 떠돌다가 다시 고향인 [[광서성]]의 계평으로 돌아갔다. 이는, 기회를 엿보다가 [[호남성]], [[귀주성]], [[호남성]], [[안휘성]] 등지에서 사람을 모집하여 다시 [[태평천국]]을 건설키 위함이었다. 1874년까지 어둠 속에서 살던 양보청은 같은 해 [[일본]]이 [[대만]]을 침공하여 각 성의 방비가 허술해지자 이 때를 기회라고 여겨 다시 [[복건성]]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태평천국을 배신했던 마융화(馬融和)[* 마륭화는 진옥성의 친척이자 부하인 부왕(扶王) 진득재(陳得才)의 부장 출신이라 양보청을 알고 있었다.]는 양보청을 발견한 후 민절총독(閩浙總督)[* 복건성과 절강성의 군무, 민정을 총괄하는 총독] 이학년(李鶴年)에게 신고했다. 결국 양보청은 밀고로 인해 [[복건성]] 진강현(晋江县)[* 현재 진장(晋江) 시]에서 체포당했고 복주(福州)[* 현재 [[푸저우]]]에서 살해당했다.[* 마융화는 보상을 받지는 못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