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양명학 (문단 편집) === 지행합일(知行合一) === 주희(朱熹)는 앎(知)과 행위(行)의 문제는 서로 분리 되어 있다고 보았다. 《주자어류》에서 주희와 제자의 문답을 살펴보면 “선후(先後)를 논하자면 앎이 먼저이지만, 경중(輕重)을 논하자면 실천(行)이 중하다.”고 한 대목이 있다. 주희가 격물(格物)을 중요하게 여긴 이유도 객관적인 이치를 체득한 이후에야 도덕적 판단이 가능하고, 선(善)을 행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왕양명의 경우에는 앎과 행위의 문제가 이원적으로 구분되어 있지 않았다. 왕양명은 ‘양지(良知)’가 이미 사람들에게 내재되어 있다고 말했는데, 여기서의 양지는 주희가 말하는 ‘이(理)’와 다르다. 주희의 '이'개념이 존재론적인 실체라고 한다면, 왕양명이 말하는 양지는 (도덕적)지식을 체득할 수 있는 의식이다. 왕양명에게 있어서 '마음(心)'은 도덕적 품성을 이미 내재하고 있는 게 아니라 ‘도덕적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의식’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앎은 대상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성취’될 수 있다. 《전습록》을 보면 ‘마음 밖에 사태와 사물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산의 꽃은 스스로 피고 지는 것 아닌가?’ 하고 물어보는 제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네가 이 꽃을 아직 보지 않았을 때 이 꽃과 자네의 마음은 모두 적막하였다. 하지만 자네가 이 꽃을 보자마자 이 꽃의 모습이 일시에 드러났다.” 주희의 입장이라면 이미 ‘꽃’은 외재적 대상으로서 실재하는 것이지만, 왕양명의 경우에는 꽃이라는 대상이 실재하는지 아닌지는 논의의 대상이 아니었다. 왕양명에게는 꽃이라는 대상을 지각함으로써 ‘꽃이 핀다’고 하는 지식이 완성되었고 내 마음 안의 형상으로 각인되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였다. 이와 같은 왕양명의 지식론을 살펴볼 때, ‘지행합일(知行合一)’이라는 명제도 지식을 획득하는 과정을 행위와 분리할 수 없다는 방식으로 이해되어야지, 행위와 지식의 경계를 구분하고 도덕적 실천이 도덕적 지식을 보장한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왕양명이 말하는 '지행합일'이란 나의 어떤 경험적 체험이 곧 지식의 형성 과정과 일체를 이룬다는 뜻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