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양공주 (문단 편집) === 1970년대 === [[데탕트]] 이후 미국 정부는 1970년 11월 15일 경기도 운천의 캠프 카이저를 시작으로 1971년 6월 말까지 1만 8천 명에 달하는 미군 감축을 강행했다. 또한 1971년 7월 [[안정리 사건]]이 일어나면서 기지촌 내의 [[인종차별]] 문제가 대두되었다. 미군이 철수하기 시작하자 박정희는 미군의 추가 철수를 막기 위해 힘썼다. 미국대사관은 주로 한국의 기지촌에서 한국인들이 흑인 병사들을 인종차별하는 것에 대한 닉슨 대통령의 우려를, 미8군 쪽은 기지촌의 불결한 환경과 성병 문제를 제기했다.[[https://www.hani.co.kr/arti/PRINT/563197.html|#]] 이에 따라 70년대 초반 미군 유치를 위하여 [[기지촌정화운동]]이 본격화되었고 각종 기지촌 관리체계가 체계화됐다. 단속이 강화되면서 미군 부대가 위안부의 사진 또는 검진증 사본을 보관하고 위안부에게 명찰부착을 명령하였고 인종차별이 3번 적발된 업체에는 미군 출입 금지 조치가 이루어졌다. 또 1972년 하반기에만 전국에 11지역 성병 진료소가 신축, 증축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