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양곤 (문단 편집) == 역사 == 원래 작은 어촌으로, 1855년 [[영국]]-[[버마]] 전쟁으로 [[영국]]의 식민 지배가 시작되면서 기존 수도였던 내륙의 [[만달레이]] 대신 바다에 가까워 [[영국인]]들이 오가기 편한 양곤으로 수도가 옮겨졌다. 옆 나라 [[태국]]의 수도 [[방콕]]과 달리 서구열강의 식민지배를 거쳤기 때문에, 도시가 전체적으로 [[영국]] 식민시대의 풍경이 진하게 남아있는 편이다. 대영제국이 처음에 양곤을 개발했을 당시 도시 인구의 상당수는 [[인도인]]이였다. 랑군에 들어온 인도인들은 인도에서 가족 대대로 배운 장사 노하우를 바탕으로 랑군 시에서 중산층으로 성장해나갔던 반면, 장사에 대한 경험은커녕 농업 기술조차 후진적이었던 미얀마 현지인들은 도시의 하류층을 구성했다.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화교들이 현지인들을 누르고 경제권을 장악해나가던 과정과 비슷했다. 하지만 여타 동남아 국가의 [[화교]]들과 미얀마의 인도인들 사이에는 적지 않은 차이점이 있었다. 미얀마에 들어온 인도인 힌두교도들 상당수는 인도 동부 지역의 브라흐민, 크샤트리야 등의 상층 [[카스트]]였는데 이들은 자기보다 가난하고 못 사는 버마 현지인들을 만만하게 보고 [[불가촉천민]] 취급을 하곤 했다. 미얀마에 들어온 인도인 무슬림들은 힌두교도처럼 버마인들을 대놓고 무시하지는 않았지만, 버마 현지인 불교도 여자들을 [[첩]][* 이슬람교에서 부인은 여러 명을 들일 수 있으나 부인들 및 남편과 지위가 동등하고, 남편은 모든 부인들을 차별없이 동등하게 대우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반면, 첩은 그저 남성의 성적 만족을 위한 지위이다. 따라서 이슬람교로 개종할 필요도 없고, 몇명이라도 거느릴 수 있다.]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이게 더 심각한 모욕 아닌가~~ 오히려 버마 민족주의자들은 인도계 무슬림들이 우월한 재력을 바탕으로 버마인 불교도 여자들을 첩으로 삼는 걸 보고 위기의식을 느꼈다. 버마의 민족주의는 이렇게 양곤에서 인도계 이민자들에 대한 반감을 바탕으로 시작되었다. [[2차 대전]]과 버마의 독립, 쿠데타 이후 양곤에 살던 인도인 인구 상당수는 인도로 피난가고 돌아오지 못하고 있지만, 인도계 무슬림 남성과 버마인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후손들 상당수는 아직 양곤을 비롯한 미얀마 각지에 남아있다. 양곤에 거주했던 [[인도인]]들이 버마인들에게 횡포를 부렸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양곤 시의 주 산업을 유지시키던 것도 이들이었다. 이러한 인도인들이 빠져나감으로써 양곤 시의 산업은 적잖은 피해를 입었다.[* [[레콩키스타]] 이후의 스페인에서 모리스코와 [[유대인]]들을 추방한 결과 경제가 무너진 것과 비슷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