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양(남조) (문단 편집) == 상세 == '''[[원맨쇼|그런데 문제는 소연 이 사람 하나가 이 나라의 전부라는 것이다.]]''' 나라는 황제 혼자서 다스리는 게 아니다.[* [[서진]]의 [[사마유]]나 [[진나라]]의 [[부소]]처럼 떡밥이야 던질 수야 있겠으나...] 하지만 양나라는 소연이 국가를 세워서 50여 년간 지배한 후 후술하는 사건 때문에 죽을 때 사실상 국가가 붕괴했기 때문에 '''개국시조이자 명군이자 [[암군]]이자 [[마지막 황제|망국의 군주]]가 되는''' 몇 안 되는 예외이다. 초기에는 제도를 개혁하고 민심을 살펴서 화폐 경제가 발전하는 등 국가가 융성했으나, 점차 가속화되는 [[인플레이션]]에다가 새로 주조한 철전은 외면받고, [[동전]]을 만들 구리는 부족해지는 상황이 발생하는 등 겉으로 보기에는 화려의 극치를 달리는 융성의 시대였지만, 속이 썩은 나무같이 이면에 문제점이 많이 발생하던 때가 당시의 양나라였다. 덤으로 빈부격차가 심해서 빈민과 불량배들이 군대에 입대하여 호구지책을 마련하는 바람에 양나라 군대 자체가 깡패의 모임으로 전락해버린 상황에서 중앙의 귀족들은 [[청담사상#s-3|사치의 극한을 누리면서 여성화하여 화장을 하고 굽 높은 신발을 신으며, 남이 옷을 입혀주지 않으면 혼자서 아무것도 못하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몰라서 말이 날뛰는 것을 보며 고위급 관리가 저건 말이 아니라 호랑이라고 하는 등 겉보기엔 신선 같지만 전혀 쓸모 없는 인간만 양산하고 있었다.]][* 일본 [[헤이안 시대]]의 귀족들도 저런 식으로 나약한 문화에 찌들어 있으면서 군인인 [[사무라이]] 계급을 집 지키는 개 정도로 여기고 멸시하다가 [[사무라이]]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끔찍하게 학살과 약탈을 당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물론 소연도 이런 문제를 너무나도 잘 알았지만 딱히 해결방법이 없었다. 이를 비관했는지 말년에 [[불교]]에 너무 심취해서 툭하면 머리 깎고 중 되겠다고 설치는 것을 신하들이 잡아와서 간신히 말리고, 잊을 만하면 또 그 짓거리를 반복하여 나라를 홀라당 말아먹었다.[* 그래서 황제 보살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후경]]의 반란에 휘말려 죽을 위기에 처했는데도, 다른 곳에 있었던 같은 소씨 황족들이 서로 눈치 보고 어떻게 이 뒤에 더 챙겨먹을까나 강구하다가 결국 늙은 황제를 굶어죽게 내버려뒀다. 소연이 다른 남조 국가들의 예를 생각해서 황족들을 탄압하지 않고 자상하게 보살펴주며 죄를 용서한 것에 비하면 참 배은망덕한 짓을 한 셈이다. 이게 550년의 일이다. 물론 소연 자체는 좋은 황제였으나 종교에 너무 깊이 빠진 것이 유일한 단점[* 물론 소연이 아무리 막장으로 타락했다 해도 처음부터 아무 생각 없이 종교에 올인한 것은 아니고, 불교계를 세력화해 그 힘으로 기존 귀족들을 견제하고 국정의 정상화를 꾀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그 정도로 회복하기에는 남조 사회가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썩었음이 문제...]으로, 그 유일한 단점 탓에 자신이 파멸하는 비극을 맞았다. 다른 황족들도 자기네들끼리 내전을 벌이다가 북조의 공격을 받거나, 휘하 장수의 꼭두각시가 돼서 결국 제대로 된 황제 노릇을 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결국 557년에 나라가 망했으니 말 그대로 무제의 재위기간 동안 잘 나가다가 죽자마자 폭풍같이 망한 셈이다. 양무제가 죽고 나서 나라가 고작 8년밖에 못 간 것이다. 그 뒤 건강 근처는 장군 [[진패선]](陳覇先)이 세운 [[진(남조)|진]](陳)나라로 이어지고, 서위의 괴뢰 정권인 [[후량]]은 양양 부근의 좁은 지역에 세워진다. 참고로 후량의 경우 명색은 국가였지만 실상은 양양만 다스리는 일개 지방 정권 이하에 불과했으므로 정식으로는 양나라로 보지 않으며, 남조로 치지도 않는다. 여담으로 양나라는 국호는 바꿨으나 스스로 남제와 같은 운명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제나라에 제사도 지내주고, 심지어 황릉도 같은 자리를 썼으며, [[오행]]의 덕도 같은 목덕(푸른색)을 사용했다고 한다. 그 외에 양나라의 특징은 후경의 난 이후에 벌어진 대규모 내전으로 인해 멀리 보면 [[삼국시대(중국)|삼국시대]]의 [[위(삼국시대)|위나라]]에서부터 전해진 문벌 귀족 계층이 한꺼번에 망해버린 것이다. 원래 남조의 귀족 계층은 왕조가 망해도 그대로 존속하며, 귀족이 되고 안 되고는 귀족들 스스로 결정하지 황제도 손을 못 대는 엄청난 권세를 누렸으나, 후경의 난과 그 이후의 혼란으로 인해 권력과 함께 지방의 장원, 즉 재력도 잃어버림으로써 완전히 몰락했다. 따라서 후경의 난 이후의 귀족 계층은 진나라에서 장식용으로 몇 명 등용된 것을 제외하고는 비참한 삶을 살았고, 일부만이 수나라의 집권계층과 혼인하여 흡수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