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야마타이국 (문단 편집) == 위치 == ||<:> [[파일:yamatoouken_nanokuni.png|width=100%]] || ||<:> 한위노국왕 금인(金印)이 발굴된 지역으로부터의 거리를 표시한 지도.[br]진한 회색은 [[고훈 시대]] 이후 [[야마토|야마토 왕권]]의 세력 범위를 나타낸다. || [[히미코]]가 여왕으로 있었던 야마타이국('사마대국' 또는 '사마일국', 邪馬臺/壹国, '臺'의 경우 やまたいこく)에 대해서는 규슈 지역설과 긴키 지역설이 대립 중에 있다. 아직 논쟁이 끝나지 않았는데, [[도쿄대학]]과 규슈대학 학자들은 규슈 지역설을 주장하고, [[교토대학]], [[오사카대학]] 학자들은 [[긴키]] 지역설을 주장한다. 이는 명문대학 사학과들 간의 자존심 대결이기도 하다. 규슈 지역설과 긴키 지역설은 [[에도 시대]]부터 히미코 관련 기록이 야마토 왕가를 기록한 것이냐 아니냐의 문제와 얽혀 아라이 하쿠세키와 국학자들 등이 열심히 싸우던 주제 중의 하나였다. * [[규슈]] 지역설 '''[[규슈]] 지역설'''은 규슈가 초기 야요이 시대의 중심지였으며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왜국으로 가는 경로가 한반도의 [[금관국|구야한국]]에서 규슈에 도착할 때까지 3,000리인 반면 규슈에서 움직인 거리는 2,000리(육로 700리, 이외에 수로 30일/수로 30일과 육로 30일에 걸쳐 1,300리)에 불과하므로, 규슈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으며 그 방향도 남쪽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거리는 틀릴 수 있더라도 단순히 태양만 보면 알 수 있는 동쪽과 남쪽을 착각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규슈에서는 한나라 시대의 거울이 많이 발굴되었는데, 이는 거울이 종교적 용도로 세습되어 사용된 것으로 제작 연대보다 오랜 기간 뒤에 매장되어 일어난 현상이라고 주장한다. 2023년 6월, 사가현에서 신사 이전 지역에서 고대 유적이 발굴되어 [[히미코]]의 것인지 확인 과정에 있다. * [[긴키]] 지역설 반면 '''긴키 지역설'''에서는 '야마타이'(邪馬臺)가 긴키 중심의 '[[야마토]]'의 기원이라고 주장하며, 이는 긴키 지역에서 발굴된 [[위(삼국시대)|위나라]]의 삼각연신수경(삼각형 무늬와 신, 짐승 등의 얼굴을 그린 금속제 거울) 등으로 뒷받침된다. 히미코가 얻어온 거울은 어디까지나 위나라의 거울이었으므로 이것이 히미코가 조공하여 얻어온 거울이라는 것이다. 한편 《삼국지》 -동이전-은 [[김해]]에서 [[대마도]]로 가는 경로를 '동남쪽'이 아닌 단순한 '남쪽'으로 기록하는 등 동남향이 남향으로 잘못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에 맞춰 방향을 교정하면 왜국으로 가는 경로는 남쪽이 아닌 세토 내해를 거치는 동남향이라고 주장한다. 최근 긴키 지역(오사카, 나라 부근)에서 야마타이국의 시대에 해당되는 도시 유적이 발견되고, 하시하카 고분(箸墓古墳)이 야마타이국의 여왕 히미코의 무덤이라는 설이 제기되어 규슈 지역설을 흔드는 주요한 근거가 되고 있다. 한편으로 일본 [[궁내청]]에서는 하시하카 고분이 제10대 [[스진 덴노]]의 선조로 제7대인 [[고레이 덴노]]의 둘째 딸 야마토토토히모모소히메노미코토(倭迹迹日百襲媛命)의 무덤이라고 주장한다. [[고레이 덴노]]부터 [[카이카 덴노]](제9대)까지의 시호는 '''야마토네코'''로 이 '야마토네코'라는 시호는 고레이 덴노가 재위했다고 하는 시절보다 후대에 '덴노'의 호칭이 확립되면서 생겨난 시호이다. 고레이 덴노 시절에는 '''타라시'''라는 시호가 들어갔는데, 제6대 [[고안 덴노]]와 제12대 [[케이코 덴노]]~[[진구 황후]](오진 덴노의 섭정)까지의 시호에 '타라시'가 들어가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에는 제10대 [[스진 덴노]]의 '''이리히코'''계와 제15대 [[오진 덴노]]~제18대 [[한제이 덴노]]까지의 '''와케'''계가 서로 다른 왕조이며, 이를 연결하기 위해 지어졌다는 것이 정설이다. 때문에 '야마토네코'가 시호로 들어가는 이들은 7세기 이후에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이 정설이다. 그래서 고레이 덴노의 딸인 야마토토토히모모소히메노미코토도 실존인물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또한 최근 긴키 지역(오사카, 나라 부근)에서 히미코의 시기에 해당되는 도시 유적이 발견되어 규슈 지역설을 흔드는 주요한 근거가 되고 있다. 하지만 거울의 경우에는 야마타이국에서 다른 국가에 선물로 주거나, 전쟁등으로 탈취당했을 가능성도 있고, 긴키 지역에서 발견되었다는 도시 유적도 야마타이국이 아니라 다른 나라일 가능성도 있다. '''주의할 점은 야마타이국이 당시 왜 지역의 유일한 국가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당시 한반도나 중국과 교류하기 위해서는 긴키 지역보다는 규슈 지역이 지리상 훨씬 유리했다는 점이다. 신라도 중국으로 갈 만한 서해 및 서남해 바다 쪽이 [[고구려]]와 [[백제]]에 막혀있는 나라의 위치 때문에 중국과 교류하기 어려워 신라가 중국에 첫 사신을 보냈을 때도 고구려나 백제의 사신을 따라갔을 정도였다. 그러다가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차지한 이후에야 독자적으로 중국에 사신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규슈의 경우, 중국까지 바닷길을 방해하는 나라가 딱히 없으니 그렇다고 치더라도 시코쿠, 혼슈는 신라보다도 훨씬 더 멀다는 것이다. 규슈 역시 항해술이 발달한 후대 기준으로나 중국을 향해 바다로 직행할 수 있는 것이지 고대의 미흡한 항해술로는 한반도 연안을 타고 이동해야 했기 때문에 사실상 신라와 비슷한 조건이었다.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히미코, version=231, paragraph=1.2)]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