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야구통제령 (문단 편집) === 한국야구에 끼친 타격 === 조선총독부는 일본 본토에서 야구통제령이 실시된 지 5개월 후인 1932년 9월, 2학기부터 야구통제안이라는 약간 변형된 이름으로 규제를 발표한다. ||①초등, 중등, 대학전문부로 나누어 게임은 각부 안에서 행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다만 당해 학교장 상호간 양해가 있을 경우는 예외로 한다. ②학생팀은 유료게임에 출장하여서는 아니된다. 단, 특수한 경우는 학무국의 허가를 얻었을 때는 예외로 한다. ③학생팀은 입장료를 징수하여서는 아니된다. 단 그 용도를 밝히 하며 학무국의 승인을 받은 경우는 예외로 하나, 이 경우에는 회장비[* 운동장 사용료를 말한다.] 게임 참가비용에 충당하기 위한 이외에는 승인하지 않는다. ④학생팀은 학교장 또는 체육협회, 체육회등의 주최 외에 출장하여서는 아니된다. 이 밖의 경우에는 학무국의 승인을 요하는 바 학무국은 종래의 관례가 되어 있는 1, 2신문사 주최의 외에는 승인하지 않는다. ⑤학생팀은 우승 후 외에는 상품을 받지 못한다.|| 유료경기 대회참가 제한등을 걸고 학무국의 허가를 받아야만 대회를 참석케해서 [[일본 고교야구 전국대회|고시엔]] 조선예선, 조선신궁대회등 일제주관대회만을 참가하도록 강제하겠다는 의도가 숨어있는 제제안이었다.[* 학무국의 허가가 내려지는 대회들은 모두 일본 주최 대회들 뿐이었다.] 이 야구통제안이 추진된후 한국야구계는 엄청난 위축을 하게 된다. 조선일보 주최의 중등학교야구리그전이 1931년, 동아일보 주최의 4구락연맹전은 1936년을 끝으로 폐지되었으며 [[전국체전|조선체육대회]]는 1933년에 아예 야구종목을 치르지도 않았고 34~35년에는 [[초등학생|소학단]]과 [[중학생|중]][[고등학생|학]]단의 경기는 열리지 않은채 성인만이 참가 가능한 청년단만 겨우 두팀씩 나와 경기를 치르다 1936년 이후로는 전면 중단되기에 이른다. 그나마 유지되던 중학야구대회는 2~4개 중등학교만이 출전하다 1937년을 끝으로 폐지되었다. 이 정책이 통과된후 남은건 일제가 주최하는 야구대회 뿐이었다. 1932년 1월, 조선실업야구연맹은 재정난을 이유로 해체되었고, 서울지역 야구팀들끼리 뭉쳐 경성실업야구연맹으로 재편되었는데 경성실업야구연맹에서 주최하는 연맹전과 흑사자기쟁탈 도시대항 야구대회 조선예선만이 개최되었다. 그나마도 1941년부터는 [[태평양 전쟁]]의 여파로 한반도에서 공식야구대회가 전면적으로 중단되기에 이른다. 이후 1945년 해방 되기 전까지 철저하게 야구가 통제되었고 한국야구는 암흑기에 빠져들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