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야구 (문단 편집) === [[KBO 리그]] === || 이 문단의 내용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은 [[한국야구사]]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 한국에 야구가 들어온 시점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999년]]에 [[대한야구협회]]와 [[한국야구위원회]]가 공동으로 발간한 ‘韓國野球史(한국야구사·유홍락, 이종남, 천일평 공저)’에서는, 1904년 미국인 선교사 [[필립 질레트]](Phillip Gillett:한국명·吉禮泰)가 황성기독교청년회(皇城基督敎靑年會·YMCA) 청년 회원들에게 야구를 보급하면서 시작된 것으로 되어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한반도에서 열렸던 최초의 야구 경기는 [[1896년]] 4월 23일 [[한성부]](서울)에 거주하는 [[미국인]]들과 [[미국 해병대]]원들의 친선경기로 알려져 있다. 그 같은 사실은 [[서재필]]이 창간했던 [[독립신문]]의 영자판인 「THE INDEPENDENT(인디펜던트)」 제9호 1896년 4월 25일치 기사로 확인됐다. 「THE INDEPENDENT(인디펜던트)」 제35호 1896년 6월 25일치 기사에는 그 해 6월 23일 오후 3시에 훈련원에서 경기를 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그 경기에 미국으로 귀화했던 [[서재필]]이 필립 제이손(Philip Jaisohn)이라는 미국식 이름으로 6번 타자, [[중견수]]로 출장 2득점을 한 기록도 남아 있다.[* 2011년 9월 중앙대 손환(孫煥) 교수와 이가람 씨가 공동으로 발표한 논문 ‘한국 최초 야구 경기에 대한 고찰(한국체육학회지 제50권 제5호)’에서 이러한 사실을 밝혔다.] 최초의 한국 야구단은 선교사 [[필립 질레트]]가 1904년 설립한 '[[황성 YMCA 야구단]]'이다. 이를 소재로 한 영화 [[YMCA 야구단]]도 나왔다.[* 야구가 소재일 뿐 장르는 코미디 영화다.] 2005년에는 한국 야구 100주년 기념 고교야구대회가 [[동대문야구장]]에서 개최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이영민]][* 고교 선수들에게 수여하는 [[이영민 타격상]]의 이름은 여기에서 따 온 것이다. 이영민은 일본 대표팀에 선발되어 미-일 친선경기에서 베이브 루스와 경기한 적도 있다.] 등 선수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몇 명의 선수가 초창기 일본 프로리그에서 활약하였다. 여태껏 최초의 야구기사는 1907년(날짜 미상) 『황성신문』이 ‘휘승청패(徽勝靑敗)’라는 제목으로 실었던 휘문의숙과 황성기독청년회의 야구경기 기사로 알려져 있었으나, 『황성신문』이 1906년 2월 17일치에 ‘타구성회(打球盛會)’라는 제목으로 보도한 것이 발견되었다. 황성기독청년 팀과 [[독일어|덕어]] 학교 팀이 마동산에서 야구를 했는데, 덕어학교가 3점차, 2점차로 연달아 이겼다는 내용이다. 이 기사에는 경기일자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고 점수도 단순히 ‘점수 차이’만 표기를 해 알 수 없다. 다만 황성신문 1906년 2월 17일자(토요일)로 발행된 신문에 실린 것으로 미루어 그 무렵에 경기가 열렸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한국야구사에서는 이 경기를 조선 땅 최초 공식야구경기로 간주하고 있다. 그중 타구성회라는 것이 눈에 띄는데 최초에는 베이스볼이라는 원래 이름이 그대로 쓰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후 타구(打球), 격구(擊毬) 등 번역어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위의 경기를 다룬 기사에서 종목 이름을 ‘타구’로 표기하고 있다. 국민체육진흥공단에서 펴낸 <이야기 한국체육사> 야구편에는 1909년 동경유학생 야구단이 모국 방문 경기에서 ‘수구(手球)’라는 명칭을 알리려 했다는 일화가 소개돼 있다. 하지만 1910년 [[한일병탄]] 이후에는 일본의 압도적인 영향력 아래 야구라는 용어가 정착됐다. 1911년 10월 <경성일보>는 조선 최초로 신문사주최 야구 경기를 연다. 선수는 전원 일본인이었고, 당연히 ‘야구’라는 용어가 쓰였다. 경성일보는 구한말 최대 민족지였던 대한매일신보를 흡수한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다. 1932년 [[야구통제령]]이 발령되어 한국야구가 크게 위축되었고 [[태평양 전쟁]]이 터지면서 전 종목의 운영이 중단되며 기나긴 암흑기를 거쳐야 했다. [[8.15 광복|해방]] 이후에는 [[1950년대]]에 [[김영조(야구)|김영조]][* 와세다대 에이스로 활약했으며 프로 데뷔 직후에 2차 대전 및 해방으로 국내로 복귀. 초기 한국야구 최고의 강타자였으며 야구 관련 지식에도 해박해 한국야구를 정착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박현식]][* 실업야구 통산 112홈런의 강타자. 인천 야구의 대부로 불림. 형 박현명은 일본프로리그 백업 포수로 뛴 적도 있다.], [[김양중(야구)|김양중]][* 한국야구 왼손 에이스의 효시. 세인트루이스 메이저리그 팀과의 경기에서 [[스탠 뮤지얼]]을 상대하여 삼진을 잡아낸 경기는 전설로 남았다.]과 같은 스타들이 활약했다. [[1960년대]]에는 [[6.25 전쟁]]의 영향으로 해체됐던 구단들이 다시 창단하며 [[한국실업야구]]가 본격적으로 진행됐다. 1963년 서울에서 개최된 아시아 야구선수권 대회 우승이 실업야구 부흥의 기폭제가 되었다. 당시 실업리그 최고의 [[슬러거]]였던 [[김응용]], 강타자 [[박영길]], [[재일 한국인]] 출신의 투수 [[신용균]], [[김영덕]], [[김성근]] 등이 한 시대를 풍미했다. 자세한 사항은 [[한국실업야구/역사]] 문서 참고. [[1970년대]] 이후 실력이 발전한 선수들이 나타났으며 [[백인천]]이나 [[이원국]] 등은 해외에서 명성을 떨치기도 했다. 1970년대에는 고교야구가 큰 인기를 얻어 실업야구와 대학야구의 인기를 누르기도 했다. [[실업야구]]에서 프로야구로의 변화가 모색되던 70년대 말에는 [[최동원]], [[김재박]] 등이 아마추어 국제대회 무대에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1977년에는 니카라과에서 열린 대륙간컵 야구대회(슈퍼월드컵이라고도 부름)에서 국가대표팀이 세계대회 최초의 우승을 거두기도 했다. [[1982년]]에 프로리그가 발족되면서 지금까지도 명성이 높은 [[선동열]] 등을 비롯해 수많은 선수들이 나타나 현재까지 프로리그가 이어지고 있다. 국가대표팀은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문서 참고. 프로리그는 [[KBO 리그]] 문서 참고. 2017년 시점에선 [[프로야구 9구단 창단과정]], [[프로야구 제10구단 관련 논란]]을 거쳐, 10개 구단간의 프로야구리그가 진행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