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애증 (문단 편집) === 역사상 인물 === * [[장소(삼국지)|장소]] ↔ [[손권]] [[적벽대전]] 때 장소가 항복파의 대표였다보니 승리 이후 손권에게 찍혀 끝도 없이 갈굼당하면서도 끝까지 손권에게 충성을 다한 장소를 기준으로 보면 애증으로 볼 수도 있다. 손권은 장소 사후 [[이궁지쟁]]으로 그의 집안을 박살냈긴 했지만 생전에는 이를 갈면서도 그를 우대했기에 ↔로 볼 수 있다. * [[조조]] ↔ [[유비]] 서로 죽이려고 했으나 교류를 한 적도 있고, 적으로 갈라선 뒤에도 서로가 진정한 적수라고 추켜세운 예가 있다. [[조조 vs 유비]]도 참고할 수 있다. * [[한고제|유방]] ↔ [[항우]] [[초한전쟁]] 내내 최대의 적수였지만 한때는 함께 진에 맞선 동지였으며, 항우가 죽었을때 유방이 항우의 죽음을 슬퍼해줬다는 기록이 있다. 홍문연을 기점으로 사이가 틀어지기 전까지는 진나라의 폭정에 맞서 함께 싸운 동맹 관계이기도 했으니 처음부터 사이가 나빴던 건 아니긴 하다. * 유방 → [[한신]] 탁월한 전략전술로 한군을 이끌어 항우를 제압하고 초한쟁패에서 이겨 유방이 통일 중국의 황제가 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인재였지만 처신을 못해 눈에 나는 행동을 너무 많이 해서 통일 이후 유방이 토사구팽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다가 원정을 떠난 사이 여후가 처형했는데 이 소식을 듣고 반은 기뻐하고 반은 슬퍼했다고 한다. * [[태조(조선)|이성계]] ↔ [[태종(조선)|이방원]] 이방원이 처음 과거에 급제했을 때 이성계는 집안의 자랑이라며 매우 기뻐했지만 독단적인 [[정몽주]] 살해를 기점으로 틀어졌고, [[1차 왕자의 난]]과 [[조사의의 난]]에서는 절정을 가하면서 말년까지 애증관계를 유지했다. 사극 [[용의 눈물]]과 [[태종 이방원(드라마)|태종 이방원]]은 이러한 둘의 애증을 충실하게 보여줬다. * [[태종(조선)|이방원]] → [[회안대군|이방간]] 군주가 될 능력도 없으면서 욕심만 강한 이방간은 [[박포]]가 부추기자 [[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고, 이방원은 친형과 싸우기 그렇다고 언플하면서도 결국 형을 제압했지만 [[1차 왕자의 난]] 때와 달리 형제를 죽이기 그랬는지 박포의 삼족만 몰살하고 이방간은 왕족으로서 특혜를 박탈하며 내쫓았다. 이방간의 혈통이 왕족으로 복권된 건 숙종 때다. * [[태종(조선)|이방원]] ↔ [[원경왕후]] 조선 최강의 숙청 군주랑 최강의 여걸이 부부로 만났던 케이스. 어떤 면에서는 부부 사이에 애증관계를 잘 보여준 예시 중 하나. 원경왕후는 남편 때문에 자기 수족이 다 잘리고 친정이 그야말로 박살나는 꼴을 봤지만, 정작 그러면서도 마흔이 넘은 나이에도[* [[정선공주]], [[성녕대군]], 요절한 공주 한명이 원경왕후가 마흔이 넘어서 낳은 자식들이다. 조선 시대에서 마흔은 손주를 보아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였으며, 조선 국왕의 평균 수명도 마흔 정도임을 생각하면 엄청난 늦둥이인 셈이다.] 태종과의 사이에서 계속 자식을 낳았다.[* 사실 왕손을 많이 얻는 것은 왕과 왕족의 당연한 의무이기도 했고, 많이 낳은만큼 갓난 아기 혹은 어릴 때 요절한 자녀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태종에겐 왕손을 낳아줄 다른 후궁들도 많았음을 고려하면, 태종에 의해 남동생들을 모두 잃은 원경왕후를 다시 임신시켰다는 건 확실히 오묘하다.] 태종도 먼저 세상을 떠난 원경왕후가 묻힌 헌릉에 세종이 불당을 짓겠다고 하자 정색하며, 거긴 언젠가 나도 들어갈 곳인데 왜 그러냐고 만류하면서 원경왕후와 합장되는 걸 원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 [[와키자카 야스하루]] → [[이순신]] '내가 제일로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순신이며, 가장 미운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좋아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흠숭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죽이고 싶은 사람 역시 이순신이며, 가장 차를 함께 하고 싶은 이도 바로 이순신이다.'라는 말을 남기며 그에 대한 애증을 표현하였다. * [[전두환]] ↔ [[노태우]] 둘 다 [[12.12 군사반란]]의 주역이었지만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집권한 이후 노태우를 견재해 한직으로 내보내고 노태우는 대통령 당선 이후 사실상 전두환의 색채를 지웠다. 거기다 김영삼 집권 이후 하나회 숙청 및 5.18 진상 규명에 의해 둘 다 구속되기까지 했다. 사면 된 이후에도 근처에 살았지만 별다른 교류가 없었다. 그러다가 [[2014년]], 전두환이 와병 중이던 노태우를 여러 차례 병문안 하면서 사실상 화해하게 된다. 그리고 7년이 지난 [[2021년]], 두 사람은 28일 간격으로 세상을 떠난다. * [[김영삼]] ↔ [[김대중]] 7, 80년대 박정희, 전두환 독재정권에 맞서 민주화 운동을 주도하였으나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의 대통령 후보 [[단일화]]에 실패한 이후 대립관계가 되었다. 다만 민주화 이후 서로 정치적으로 대립과 갈등, 의견차를 반복하긴 했지만 김대중은 대통령이 된 후 과거 본인과 함께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던 전적을 고려, 참작해 대통령직에서 퇴임한 김영삼에게 정치 보복을 가하지 않았다. 김영삼 역시 김대중이 죽기 전에 그와 화해하고 싶다는 의지를 내비치기도 하였다. * [[윈스턴 처칠]] ↔ [[샤를 드골]] 각각 영국과 자유 프랑스를 이끌며 [[추축국]]에 맞서 [[제2차 세계대전]]의 연합군 승리를 위해 협력하였지만, 동시에 둘이 만났다 하면 고성에 막말을 하며 개와 고양이처럼 싸웠다. 게다가 두 사람 모두 자존심과 고집이 세기론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사람이어서 더더욱 충돌할 일이 많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틀에선 끝까지 협력 관계를 유지했으며 서로의 위치와 능력을 인정하였다. 처칠이 먼저 사망하자 드골은 군복 차림으로 직접 장례식에 참석했으며 '이제 영국은 더 이상 대국이 아니다'라는 감상을 내놓았다. 어떻게 보면 국민 감정과 외교 협력의 모습이 복잡하게 엉킨 [[영불관계|프랑스-영국 관계]]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관계이기도 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