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애제(당) (문단 편집) === 황제로서의 삶 === [[주전충]]은 대역죄인 이유를 꼭두각시 황제로 옹립하기에는 부담이 있었다. 그래서 이유의 친동생이자 당소종의 아홉째 아들인 이축을 옹립했다. 이 때문에 이축은 주전충의 [[허수아비]] 황제였고, [[904년]]에 아버지 소종의 뒤를 이어 13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했다. 새 황제가 등극하면 반드시 연호를 새로 정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어떤 결정권도 없는 꼭두각시 황제였기 때문에 연호도 정하지 못하고 소종 때의 연호인 [[천우]]를 그대로 사용했다. 천우 2년(905) 11월 애제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의식을 거행하려고 했다. 제천의식은 연례 행사였기 때문에 그가 아무리 허수아비 황제였더라도 당연히 친히 집전하는 국가의 대사였다. 관례에 익숙한 조정대신들도 애제에게 당나라의 번영을 위해 성대하게 거행해야 한다고 아뢰었다. 주전충은 아직도 당나라를 위해 충성하는 신하들이 있음을 알고 분노했고, 즉시 행사 준비를 중단시켰다. 재상 유찬(?~906)은 주전충이 딴 마음을 품고 있음을 직감했고, 주전충에게 천하를 얻으려면 당나라 조정 대신들을 몰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천우 2년 유찬은 주전충에게 배구 등 조정 중신 30명의 명단을 바쳤다. 그들은 대부분 충신들이었으며 유찬과 사이가 나빴다. 조정대신들과 사이가 나쁜 책사 이진(?~923)도 찬동했다. 주전충은 명단에 오른 중신들을 백마역(白馬驛, 지금의 하남성 활현)으로 끌고 와서 살해하게 했다. 중국 역사에서는 이 참사를 '백마역의 화'라고 부른다.[* 구양수의 <붕당론>에서는 이 백마역의 화가 일어난 시기를 '당나라 소종 연간(唐昭宗時)'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이는 애제의 선황이었던 소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애제의 시호인 소선제(昭宣帝)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쪽이 합리적이며, 백 번 양보하더라도 구양수의 착각으로 결론이 날 대목이다.] 주전충은 이 참변 이후에 당왕조를 없애고 [[후량|자신의 왕조]]를 세우기로 결심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