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애설스탠 (문단 편집) == 유럽과의 관계 == 웨식스 왕조 후기의 웨식스 왕들은 유럽 왕들에게 성공의 상징이었다. 920년경의 유럽 대륙의 왕가들은 계속되는 전쟁과 내분을 겪고 있었다. 각종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던 애설스탠은 잉글랜드에서 정치적으로 성공을 거두었고, 더 나아가 전쟁만 잘하는 전사로서의 이미지를 벗어나서 유럽의 [[프랑크 왕국#s-2.2|카롤링거 왕조]]의 이상을 실현하려 하였다. 웨식스 왕정은 카롤링거 왕조와 외교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 관계는 애설스탠의 증조할아버지인 [[애설울프]]가 [[신성 로마 제국]]의 전신인 [[프랑크 왕국]]의 왕의 딸과 결혼하고, 그들이 낳은 아들이 다시 [[알프레드 대왕]]의 딸과 결혼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애설스탠의 이복누이인 에아드기푸도 서프랑크 왕국의 왕인 단순왕 [[샤를 3세]]와 결혼했다. 애설스탠의 재위 기간 중에는 유럽 쪽과 결혼을 통한 동맹이 강화되었다. 애설스탠은 여자 친족들이 자신의 신하에게 시집가는 것을 꺼렸고, 따라서 그들은 주로 유럽 쪽으로 시집갔기 때문이다. 그의 누이들은 모두 유럽의 귀족들과 결혼했거나 아니면 아예 결혼을 하지 않았다. 애설스탠의 가장 중요한 유럽 동맹은 새로 떠오른 동프랑크 왕국의 [[신성 로마 제국/역대 황제#s-3|오토 왕조]]였다. 동프랑크의 카롤링거 왕조는 10세기 초반에 몰락했고, 새로 등장한 오토 왕조의 왕 [[하인리히 1세]]는 세력 기반을 쌓을 필요가 있었다. 하인리히 1세는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아들을 카롤링거 왕가의 여자와 결혼시키려 했으나 적합한 인물이 없었다. 꿩 대신 닭 삼아 웨식스 왕가가 혼처로 물망에 올랐고, 하인리히 1세는 아들인 오토, 즉 훗날의 대제 [[오토 1세]]를 애설스탠의 이복누이와 결혼시켰다. 애설스탠은 당시 관습에 따라 유럽의 왕자들과 양아버지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이들이 권력에서 쫓겨나면 유럽 대륙으로 병력을 보내 잃었던 영토나 왕위를 되찾게 도와주었다. 예를 들어, [[하랄 1세 하르파그리]]의 뒤를 이어 [[에이리크 1세 블로됙스]]가 노르웨이의 왕위에 오르자, 자신의 궁정에 머무르고 있던 [[하랄 1세 하르파그리]]의 막내아들인 [[호콘 1세]]가 그를 쫓아내고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지원하였다. 물론 항상 성공한 것은 아니었고 실패한 원정도 있었다. 이렇게 활발했던 유럽 대륙과의 관계는 그가 죽고 나서 곧 끊겼고, 덴마크의 [[크누트 대왕]]이 [[잉글랜드]] 왕이 되기 전까지는 유럽에서의 영향력은 미미한 상태로 지속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