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애기살 (문단 편집) == 개요 == [[화살]]의 한 종류로 일반적인 화살보다 짧다. 한자어로 편전(片箭)이라고도 한다. 활, [[덧살]]([[통아]]:桶兒)과 한 세트이다. 덧살([[통아]])을 덧붙여 그것을 가이드레일로 삼아 발사하거나 [[쇠뇌]]로 발사하는 화살이다.[* 일반적으로 국궁으로 쏘는 걸로 알려져 있지만, 조선 후기 쇠뇌 관련 병서 <노해>에 쇠뇌로 편전(애기살)을 쏘는 것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 걸로 보아 쇠뇌로도 쏠 수 있다.] 발사 후에는 덧살은 사수의 손에 남아 덜렁거리고 화살만 날아간다. 그래서 멀리서 봤을 때 화살이 제대로 발사되어 시위를 떠났는지, 아니면 사수의 실수로 떨어진 건지 알아채기가 매우 힘들다.[* 당하는 입장에선 작은 크기 탓에 덧살 같은 걸 가지고 있지 않은 이상 주워서 다시 쏠 수도 없고, 덧살을 노획해서 갖고 있어도 훈련을 받지 않아 사용법을 모르면 쏠 수 없었다. '분명 저 녀석이 실수해서 화살이 발사되지 않았는데 '''[[너는 이미 죽어 있다|내 가슴팍에 꽂힌 이건 뭐지?]]'''' 라고 착각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특수한 사격방식 때문에 높은 숙련도와 함께 사격시 극도의 주의를 요하는 화살이기도 하다. 숙련된 사람이 아닐 경우 아무데로나 화살이 날아갈 수 있다. 임란 당시 한 의병장이 쓴 <[[고대일록]]>을 보면 편전을 연습하다가 팔목이 꿰뚫리는 심각한 사고가 일어날 수도 있음을 알 수 있다.[* 화살이 짧을수록 사고가 날 확률이 높다. 레일에서 탈선한 화살을 보지 못하고 발사해서 눈먼 화살이 되는 것. 이로 인해 화살의 길이가 계속 길어졌다. 초기와 후기의 편전의 길이를 비교해보면 심하게 차이가 난다. 근래에 복원한 애기살들 중에는 총의 약실과 총탄의 관계처럼 덧살과 애기살이 꼭 맞물리게 제작하여 오발 위험을 크게 줄인 물건도 있다.] >편전은 다만 우리나라에만 있다.[* [[애기살#s-6|후술]]한 항목을 보면 이 사람이 잘못 알고 있던 것이다.] 그래서 중국의 창이나 일본의 총과 함께 천하무적이 되었다. 상고하건대, 중경유수(中京留守) 김강신(金强伸)[* 중경은 개경의 다른 이름인데, 중경유수라는 관직은 고려 충렬왕대 이후에 보이기는 한다. 하지만 김강신이라는 인물은 18세기 저술인 청장관전서에만 나오고 고려 당시의 기록이나 조선 초기의 기록에서조차 그 이름이 언급이 없다. 이덕무는 자신이 어디서 "중경유수 김강신이라는 인물이 처음으로 편전을 쏘았다"는 기록을 보았는지 밝히지 않았다.]이 원병(元兵)에게 포위되어 병기가 다 떨어졌을 때 엽전(葉箭)으로 화살촉을 만들어 사용하다가 원병의 화살 하나를 얻으면 넷으로 잘라서 통편(筒鞭)을 가지고 쏘았으니, 이것이 편전의 시초이다. >----- >청장관전서 제55권 앙엽기(盎葉記)2 한국에서는 위와 같이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덕무의 문집인 청장관전서 앙엽기에서, 고려 시대 대몽항쟁 중 보통 화살을 네 개로 쪼개 사용한 것이 처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위의 [[애기살#fn-4|주석]]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앙엽기에 나온 내용에 대한 출처가 없다는 점과 이 때문에 김강신이 실존인물인지에 대한 논쟁이 존재하는 것은 물론 [[애기살#s-6|후술]] 할 내용에서도 언급되지만 태종실록에 기록된 내용을 통해 고구려 후기 이전부터 한국에 편전이 존재했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기에 현재 이덕무가 주장한 편전의 고려시대 기원설은 확인되지 않은 하나의 설로만 인정되고 있다. 다만, 앙엽기의 기록을 통해 애기살의 길이를 추정할 수 있는데, 보통 현대의 화살은 70~80센티미터 정도의 크기를 개인에 따라 잘라 맞추어 쓴다. 국궁의 특성상 귀 뒤까지 만작하므로 10여센티를 더해 최대 90센티미터 정도로 추정해볼 수 있는데, 네개로 쪼갰다면 약 15~20센티미터 정도의 길이로 추정할 수 있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가 애기살을 정말 잘 쐈다고 전해진다. [[제1차 요동정벌]] 당시 성 위에 농성 중이던 적군 70명을 애기살로 [[헤드샷|모두 머리를 맞혀 죽였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남아있다.[* 원사나 중국 쪽 기록으로 교차검증을 했을 때도 이성계의 무예 실력이 압도적이라는 사실은 거짓이 아니니 설득력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라 할 수 있다. 실제로 단 1,000명으로 북원 나하추의 좌, 우, 중군을 상대로 버티거나 나하추의 장수 5명을 한번에 처치한 기록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