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앙골라 (문단 편집) === [[포르투갈령 앙골라]] (15세기 ~ 19세기) === 1483년 [[포르투갈]]의 항해사 [[디오고 캉]](Diego Cão)이 앙골라 북부 해안에 도착하여 [[콩고 왕국]][* 콩고 왕국의 수도인 음반자콩고는 앙골라 북서쪽에 있었고, 2017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http://heritage.unesco.or.kr/%EC%9D%8C%EB%B0%98%EC%9E%90-%EC%BD%A9%EA%B5%AC-%EC%98%9B-%EC%BD%A9%EA%B3%A0-%EC%99%95%EA%B5%AD-%EC%88%98%EB%8F%84%EC%9D%98-%EC%9C%A0%EC%A0%81/|등재]]되었다.]을 방문하면서 처음 [[유럽]]에 알려졌다. 당시 앙골라 지역에는 [[은동고 왕국]]을 포함한 몇 개의 부족 왕국들이 있었으며, 한동안 이러한 체제를 유지하였다. 본격적인 포르투갈의 진출은 1540년대 [[선교]] 활동을 하면서 이루어졌으며, 1575년 포르투갈은 군대를 이끌고 앙골라를 침공하여 해안가를 중심으로 정착하였다. 앙골라의 [[대서양]] 연안 도시들 대부분은 이런 목적으로 [[포르투갈인]]들이 개척한 것으로, 수도인 [[루안다]]는 물론 벵겔라, 루방고, 그리고 본토에서 떨어져 있는 카빈다 모두 마찬가지. 이 시기까지 포르투갈에게 앙골라는 그렇게 중요한 지역은 아니었다. 주로 [[인도]] 무역을 할 때 지나가는 거점 지역으로 활용되거나, 포르투갈의 [[브라질]] 식민지 개척에 필요한 [[노예]] 인력의 공급지로 이용되었다. 앙골라 영토가 지금은 넓어보이지만 그 중에서 [[대서양]]과 인접한 연안 지역의 몇몇 항구만이 원래 포르투갈의 관심사였다. 그러던 것이 당시 포르투갈이 [[콩고]]를 먼저 발견했다며 식민지 영유권을 주장하였는데 19세기에 이미 포르투갈은 열강 중에서 위세가 많이 떨어진 상태라 무시 당하고, [[벨기에]]가 식민지로 삼아버려 놓치는 일이 일어났다. 게다가 바다 반대편에서는 포르투갈의 중요 식민지였던 [[브라질]]이 독립하면서, 이에 포르투갈은 아직 가지고 있는 영향권이라도 잘 써먹어 보자는 심정으로 본격적으로 앙골라 식민지화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이에 따라 내륙 진출이 이루어지고, 이후 열강들 간에 체결된 일련의 조약을 통하여 오늘날의 앙골라 국경선이 확정되었다. 포르투갈의 기본적인 식민지 정책은 동화와 강제 노역이었다. 이에 따라 [[포르투갈어]]를 배우고 [[기독교]]로 개종한 이와 그렇지 않은 이를 철저하게 차별하여 대우했으며, [[플랜테이션|식민지 농업]]과 [[다이아몬드]] 광산 개발을 위하여 무수히 많은 앙골라인들이 '계약노동'이라는 이름으로 강제 동원되었다. 하지만 막상 포르투갈어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당대 본국인 포르투갈조차 20세기 중반에도 식민 열강답지 않게 문맹률이 40%를 한창 넘나들었을 정도로 교육에 대한 투자가 미비했기 때문에, 앙골라 교육에 대한 투자가 제대로 이루어질 리는 만무했다. 그래서 1950년대 당시에 앙골라의 문맹률이 98%에 달했다. 포르투갈어는 물론이고 ABCD를 외우는 사람조차 소수 계층에 불과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