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암흑시대 (문단 편집) ==== 중세 암흑시대 부정론 ==== 흔히 '[[서로마 제국]]의 멸망으로 로마 문명은 단절되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엄연한 정식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위치하는 정통 로마인 [[동로마 제국]]에 의해 로마의 [[문명]]은 계승, 발전되었으며, [[프랑스]]와 [[아일랜드]]도 가톨릭 [[수도원]]들이 자체적으로 요새화하고 기록과 법치를 유지하는 등 로마의 유산을 보존했다. 또한 [[중세]] 전반을 암흑시대라고 지칭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고대]]와 [[근대]]는 좋은 거고, 그 사이는 나쁜 거였다. 특히 중세는 아주 나쁘다"라는 계몽주의 발흥기의 근대적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편견 속에서 중세란 엄밀히 정의된 시대라기보단 '''눈부시게 발전했던 로마 시대보다는 이후고 문명이 발전한 지금은 아닌 그 사이의 가난하고 미개한 어느 시대'''라는 뜻 정도로 수백년간 사용되었다. 또 이러한 말이 나온 '근대'는 다름 아닌 [[르네상스]] 시대로, 현대 역사에서는 중세 말기에 포함되는 시대로 본다. 최근 들어 중세를 재조명하려는 서양사학계에서는 중세를 마냥 암흑기라고 규정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비판하며 중세를 너무 암울하게만 해석하지는 말자는 관점이 대두되고 있으며, 국제 과학사학 및 과학철학연맹 회장인 로널드 넘버스가 이런 쪽으로 가장 잘 알려진 역사학자 중 하나이다. 굳이 어렵게 재조명할 것도 없이 당장 거성 [[토마스 아퀴나스]]와 [[단테 알리기에리]]가 어느 시대 사람인데 중세를 싸잡아서 암흑시대라고 하겠는가? 서유럽을 기준으로 해도 적어도 서기 1천년기 이후 이탈리아 도시국가 문명은 암흑기로 단정하기엔 중세시대 내내 지나칠 정도로 번영했으며, 오히려 중세가 끝나자마자 절대군주제와 중앙집권의 이점을 갖춘 초강대국의 침략과 정복전쟁에 휩쓸리며 쇠퇴하게 된다. 역사학자들은 초기 중세 서유럽도 암흑시대로 보지 않는다. 우선 게르만 왕국들은 매우 로마화된 국가들이었다. 가령 북아프리카 반달 왕국의 행정구조는 로마와 유사하며, 다른 게르만 왕국들 역시도 근본적으로는 서로마의 통치 엘리트들과 국가조직을 그대로 인수인계했다. 예를 들어 서고트 왕국의 경우에도 행정체계나 관직 등에 있어서 로마의 그것을 매우 똑같이 따라했으며, 이는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다. 물론 토착 로마인들은 이들 게르만인들을 매우 무시했지만, 이것은 객관적인 의미의 문명화 문제가 아니라 민족 감정의 문제이며, 가톨릭과 아리우스파 사이의 종파적 적개심까지 섞인 문제였다. 이를테면 [[동고트 왕국]]에서 토착 로마인들과 고트족의 차이는 문명화의 차이가 아니라, 아리우스주의 고트인들과 가톨릭 로마인들 사이의 종교 차이였다. 더군다나 소위 야만적이라는 게르만인들은 의도적인 파괴 행위를 하지 않았고, 단지 정치적 난세만 야기했을 뿐이다. 그리고 이마저도, 정치적 난세에 의한 문명사적 민폐 행위는 게르만인들이 아니라 동로마인들이 훨씬 심했다. 흔히 아틸라의 파괴행위나 게르만족의 로마 약탈 등을 들기도 하는데, 밑에 나와있는 것처럼 아틸라의 파괴행위는 근본적으로 매우 극단적으로 과장, 과대평가된 면이 많으며, 게르만 족의 로마 약탈은 '파괴와 방화'라기보단 '조직적인 도둑질'이었다. 실제로 로마 약탈 당시 없어졌다고 생각했던 문화재가 최근 매우 멀쩡한 상태로 발견되어서 이탈리아에 충격을 준 바 있다. 반달족 역시 마찬가지다. 반달족은 파괴의 대명사로 쓰이는 매우 불명예스러운 대접을 받고 있는데, 해당 문서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오히려 반달당한 것은 반달족들이었다.''' 동로마가 벌인 조직적인 증오범죄는 반달족에 대한 흔적을 말끔히 일소시켜버렸을 뿐더러, 아이러니하지만 안그래도 종파갈등으로 불안했던 기독교 카르타고 교구를 완전히 붕괴시켜 후일 이슬람 침략 이후 엄청난 속도로 이슬람화되게 하는데 영향을 크게 미쳤다. 학자들은 북아프리카 기독교가 몰락한 가장 큰 이유가 종파갈등 및 동로마의 파괴행위로 인한 기반 붕괴로 본다. 또 동로마 고토 수복 전쟁 문서에도 나와있지만, '로마'라는 정체성을 서유럽에서 완전히 일소시켜 버린건 야만적인 게르만족이 아닌 무리한 침공과 악질적인 파괴행위로 로마를 서유럽 최고의 도시에서 불과 몇백명만이 사는 소도시로 만들어버린 동로마 본인들이다.[* 이때 로마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교황이 한탄을 할 정도였다. 교황마저도 없었다면 로마라는 도시는 지금쯤 이탈리아의 수도가 아니라 안티오키아처럼 버려진 작은 마을 수준이 되었을 것이다. 동로마의 깽판으로 완전히 부서져버린 서유럽 간의 연결고리를 간신히 붙잡아 지탱해 끝내 [[신성 로마 제국|서로마의 부활]]을 이뤄낸건 바로 기독교였다. ] 그런데 도대체 누구를 탓한단 말인가. >이탈리아 도시들은 5세기 초와 6세기에 서방의 다른 도시들만큼 심각한 타격을 입지 않았다. 410년에 알라릭이 로마를 약탈한 사건은 심리적으로는 중대한 충격이었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렇게 심각한 파괴를 초래하지는 않았다. 455년 반달족의 공격조차 그렇게 심각한 참화는 아니었다. 그러나 유스티니아누스가 [[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재정복 전쟁]]을 벌이는 동안 심지어 로마를 포함한 이탈리아의 대도시들 대부분은 초토화되고 인구가 격감했다. >---- >《하이켈하임 로마사》(김덕수 번역) 981쪽 그마저도, 이탈리아는 고대부터 근대 초까지 콘스탄티노폴리스와 함께 유럽에서 가장 문명사적으로 활기찬 곳이었다. 또한 편견과 달리 메로비우스 왕조와 카롤루스 왕조의 엘리트들 대다수는 결코 문맹이 아니었으며, 이들이 통치를 위해 남긴 문서들은 양과 질에서 후기 로마제국보다 뒤떨어지지도 않았다. 학자들이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메로빙거 왕조시절 이미 기사들을 비롯한 귀족이나 핵심 엘리트층은 정교한 수준의 전술적, 전략적 명령을 이해하고 수행할 만한 학식이 있었으며, 군사적 능력 또한 이전에 무시되던 것과 달리 로마 시대보다 결코 발전했으면 발전했지 뒤떨어지지는 않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