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알가잘리 (문단 편집) == 생애 == 그의 부친은 투스[* [[피르다우시]]와 [[니잠 알 물크]] 등 페르시아인 지성들이 탄생한 도시]에서 양털을 가공하는 장인이었다고 전해진다. 알가잘리와 그의 동생 아흐마디에 대한 무리한 교육비 투자로 알가잘리의 부친은 결국 재산을 탕진했으며, 형제는 생계 문제를 위해 공부에 전념할 수 밖에 없었다. 투스와 [[니샤푸르]]의 니자미야 학원에서 이맘 알 주와이니의 문하에서 이슬람 법학과 신학을 공부한 그는 [[셀주크 제국]]의 명재상이자 동향 출신인 [[니잠 알 물크]]의 눈에 띄어 33세에 [[바그다드]]에 있는 니자미야 학원의 교수로 발탁되는데, 그 당시의 학자로서는 가장 명예로운 자리에 오른 셈이었다.[* 당시 바그다드와 니샤푸르에 세워진 니자미야는 각각 3,000여 명의 학생을 수용할 수 있는 당대 최고 규모의 학교였다.] 그는 법학과 신학에 관한 논문을 썼고, 철학의 여러 주제에 정통했으며, 그의 법적 결정은 권위있는 것으로 존중받았다. 종교적 전통에 충실한 동시에 정치적 현실을 중시하는 실용적인 태도를 보여준 것으로 평가받았는데, 당시 [[칼리프]]가 세력이 점점 강해지는 튀르크계 군인들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가에 대해 상세한 지침과 기록을 남겼다고 한다. 그를 지원했던 [[셀주크 제국]]은 [[수니파]] 이슬람 왕조로, 이집트를 중심으로 한 시아파 [[이스마일파]]들이 세운 [[파티마 왕조]]와 대치 상태에 있었고 수니파 [[칼리파]]를 보호하던 입장이었다. 이는 파티마 왕조의 알 아즈하르 대학의 이스마일파 신학자들이 [[신플라톤주의]] 사변철학에 바탕을 둔 쿠란 해석을 바탕으로 셀주크 제국의 종교정책을 비판했기 때문이었다. 시아파에는 이스마일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시아 12이맘파에서도 [[https://en.wikipedia.org/wiki/Shaykh_Tusi|무함마드 투시]]란 인물이 수니파의 사힛 알 부카리를 모방하여 나름 고증작업을 거친 하디스 편집본을 출간하자, 셀주크 제국의 재상 니잠 알 물크는 혹시나 [[아바스 왕조|압바스]] [[칼리파]]의 권위와 [[셀주크 제국]]이 과거 [[우마이야 왕조|우마이야 칼리프조]]처럼 종파 갈등으로 붕괴되는 것이 아닌가 우려하기 시작했다. 이런 가운데 알가잘리는 후원자들에게 보답하는 차원에서 1091년 출간한 <철학자들의 부조리>라는 책에서 이스마일파 [[이븐 시나]], 그리고 그의 스승이었던 (그리고 시아파로 추정되던) [[알 파라비]]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그의 저서 <철학자들의 부조리>는 시아파 철학자 이외에도 수니파 철학자였던 [[알 비루니]]까지 저격하는 내용을 담았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를 부러워했던 것과 다르게, 그는 명예를 누리면 누릴수록 더욱 회의감을 느꼈다. 스스로를 무가치한 존재로까지 생각하는 지경에 이르자 그는 강의를 지속하지 못할 정도로 극심한 슬럼프에 시달렸다. 서구 학자들은 당시 이슬람 사변철학을 열심히 공부하던 알가잘리가 후원자들의 눈치 때문에 다른 사변철학자들을 공격하면서 양심의 가책이나 학문의 회의를 느낀 것이 아닌가 해석하기도 한다. > 거의 6개월 동안 나는 세속적인 욕망이 가져다주는 매력과 영생에 대한 충동 사이를 끊임없이 오락가락했다. 더 이상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나는 어느 쪽으로든 결론을 내야 했다. 하나님이 나의 혀를 말라붙게 만드는 바람에 강의를 할 수가 없었다. 어느 날 아끼는 제자들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 강의에 나섰으나, 내 입에서는 단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고, 나는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다. 언어장애로 인해 나는 상심에 빠졌고, 음식과 물을 소화하고 흡수할 기력마저 잃었다. 나는 아무것도 입에 대지 못했다. 갑자기 강의실에서 말이 단 한 마디도 나오지 않다니, 알가잘리가 심리적으로 예민한 사람이었을까? <철학자들의 부조리>를 출간한 다음 해 1092년 그를 지원하던 [[니잠 알 물크]]가 암살당했다. 든든한 후원자가 사망하고 자신이 가르치던 바그다드 니자미야 학생들이 광신도가 되어 시장에서 주먹다짐을 하고 다니고 다른 대학교 학생들과 패싸움을 벌이는 상황에서는 그 누구라도 슬럼프에 빠지기 쉬웠다. 이 기간동안 알가잘리가 새로 출간한 책마저 혹평 속에 묻히고 말았다.[* 이스마일파를 비판하는 책을 냈는데, 신경쇠약에 걸린 상태에서 대충 쓴 나머지 제대로 된 출처 없이 그냥 저잣거리에서 떠도는 카더라 통신 이야기만 잔뜩 담아 이스마일파 교리 비판서를 냈다. 당연히 알 아즈하르 대학에서 그를 공개적으로 조리돌림했고, 알가잘리는 심리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의사마저도 마음의 병을 고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체념하자, 1095년 알가잘리는 대학을 뛰쳐나가 10년 동안 유랑하는 [[수피]]의 삶을 살게 되었다. 10년 동안의 유랑 생활이 끝난 후에는 교수로 복직했다. 니샤푸르에서 다시 교수직을 얻은 그는 [[샤리아]]와 [[수피즘]] 사이의 균형과 조화에 관련한 정교한 이론을 확립했다. 자신도 철학자 출신이었으나 후원자들의 요청에 따라 과학과 철학을 공격하면서 명성을 쌓았던 그는 수피가 된 이후에야 "신의 섭리를 단순히 이성만으로 알 수 없다"는 신비주의를 통해, 자신의 아노미를 [[정반합]]으로 극복했던 것이다. 그가 수피즘과 수니파 신학을 조합하는데 여생을 바쳤던 것 역시 이런 정반합의 노력으로 해석 가능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