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희제 (문단 편집) === 민족기업·교육활동 === 1913년 11월 5일 독립운동 자금의 조달과 일제 자본에 맞서는 민족기업의 발전을 위해 이유석(李有石)·추한석(秋翰奭[* 추한식(秋翰植)이라고도 한다. 당시 [[경상남도]] [[부산광역시|부산부]] 읍내면 옥정동(현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에 거주하고 있었다.] 등과 더불어 경상남도 [[부산광역시|부산부]] [[동광동3가|본정3정목]](현 [[부산광역시]] [[중구(부산)|중구]] [[동광동3가]]) 1번지에 백산상회(白山商會)를 설립했다. 곡물·면포·해산물 등을 판매하던 소규모 개인상회로 출발한 백산상회는 1919년 5월 자본금 100만 원과 총주수 2만 주, 주주수 182명의 백산무역주식회사로 확대 개편되었고, [[경상북도]] [[대구광역시|대구부]]·[[경기도]] [[경성부]]·[[함경남도]] [[원산시|원산부]]·[[중화민국]] [[봉천성]] [[선양시|심양현]](瀋陽縣) 등지에 지점과 연락사무소를 설치하는 등 대규모 회사로 성장했다. 또한 백산상회를 통해 당시 직원이던 [[윤현진(독립운동가)|윤현진]](임시정부 초대 재정차장)을 상해로 보내어 임시정부에 자금을 조달하기도 했다. 안희제는 회사의 확장에 따라 부산상업회의소 부회두와 [[부경고등학교|부산상업학교]] 이사를 역임했으며, 부산부내 유지들과 더불어 부산진과 영도에 공립보통학교를 설치했다. 1919년 [[3.1 운동]]을 전후하여 [[남형우]] 등과 국내외 연락을 담당했으며, 의령군에서 [[기미독립선언서]] 수만 장을 제작하여 영남 각지에 배포하고 의령군 지방의 독립운동을 지휘했다. 이해 11월에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회사 관계자 및 영남 유지들과 함께 기미육영회(己未育英會)를 조직하여 [[전진한]]·[[안호상]]·[[이극로]]·[[문시환]]·[[신성모]]·[[https://terms.naver.com/entry.naver?cid=46648&docId=552190&categoryId=46648|김범부]](金凡夫)[* 소설가 [[김동리]]의 맏형이다.] 등 많은 장학생을 각국에 유학시켰다. 1920년 동아일보사 창립 때 [[최준(1884)|최준]](崔浚)·허걸(許傑)·이종화(李鍾和)·윤현태(尹顯泰) 등 백산회사 관계자들과 함께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그해 4월부터 1921년 5월까지 [[동아일보사]] 부산지국장을 맡기도 했다. 1921년 친일단체 상애회(相愛會) 회장이자 친일파의 거두인 [[박춘금]]의 도항증명서(渡航證明書) 강매 기도에 맞서 부산에서 '박춘금 성토대회'를 열고 항의·진정 투쟁을 벌여 도항증명제를 폐지하게 했다. 또한 임시정부와 연계하여 [[연통제]](聯通制)를 구성하고, 그 교통사무국을 만주의 [[이륭양행]](怡隆洋行)과 백산무역주식회사에 두게 했다. 그러나 백산무역주식회사는 계속된 독립운동자금 공급과 부채, 일제의 수색, 장부검열 및 회사 간부에 대한 감금·고문 등의 탄압을 견디지 못하고 1927년 해산되고 말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