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희제 (문단 편집) === 초기 === 1885년 8월 4일 경상도 의령현 부산면 입산동(현 경상남도 의령군 부림면 입산리)에서 아버지 안발(安鏺, 1857. 12. 7 ~ 1916. 2. 27)과 어머니 [[고성 이씨]](1860. 6. 13 ~ 1937. 11 .29)[* 이운망(李雲望)의 딸이다.] 사이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891년(고종 28)부터 16촌 지간의 족형(族兄)인 서강(西崗) 안익제(安益濟, 1850. 2. 11 ~ 1909. 6. 16)[* 초명 안인제(安仁濟).]에게 한학(漢學)을 수학했다. 사립 흥화학교(興化學校)에서 신학문을 배운 후 1905년 국권회복을 위한 지식의 필요성을 느껴 [[고려대학교 경영대학|보성전문학교 경제과]]에 입학했으나 [[이용익|교주]](校主) 배척운동에 관련되어 중퇴하고 [[양정고등학교(서울)|양정의숙]]으로 옮겨 24세 때 졸업했다. 1907년 민중 계몽과 애국사상 고취를 위해 지방순회강연을 했으며, 지방 유지들과 함께 [[부산광역시|동래부]] 계서면 [[구포동(부산)|구포리]](현 [[부산광역시]] [[북구(부산)|북구]] [[구포동(부산)|구포동]])에 [[구포초등학교|구명학교]](龜明學校)[* [[구포초등학교]]의 전신이다.]를 설립하여 교장이 되었다. 이어 의령군 풍덕면 상동(현 의령군 [[의령읍]] 중동리)에 의신학교(宜新學校)를 세웠으며, 이듬해인 1908년에는 고향 의령군 부산면 입산동 설뫼에 창남학교를 설립했다. 1909년 [[이시영(정치인)|이시영]]과 교의를 맺고 [[신민회]]에 참여하는 한편, 신민회원인 [[윤세복]]·[[김동삼]]·[[신백우]]·[[고순흠]]·이원식(李元植)·[[서상일]] 등 120여 명을 규합, 비밀 독립운동단체인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조직해 국권회복운동을 펼쳤다. [[경술국치]] 후인 1911년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모스크바·만주 등지를 돌면서 독립운동가들과 구국방책을 논의했으며, 최병찬과 함께 〈독립순보 獨立旬報〉를 간행했다. 1914년 국내에서의 운동자금 조달과 연락을 위해 귀국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