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탈리아 (문단 편집) ==== 테케 베이국[* 테케는 튀르크멘 부족명 중 하나로, 옛 [[리키아]] 지방을 포괄하는 테케 반도의 지명으로 남아있다]의 수도 ==== [[파일:안탈리아 해변.png]] 평화와 문화적 발전기인 테케 베이국 시기에 형성된 구도심 13세기 말엽 룸 셀주크의 붕괴 후 아나톨리아 각지에는 튀르크멘 베이국들이 들어섰다. 한세기 이전 보르굴루 정복 후 일대를 영지로 받은 하미트 베이의 손자인 펠레큇틴 뒨다르 베이는 에레을리를 중심으로 자립하였고, 1301년 안탈리아의 총독이 타지역 순시를 위해 성을 비운 틈에 도시를 접수한 후 동생 유누스를 총독으로 봉하였다. 1316년 뒨다르 베이는 술탄을 칭하였는데 (하미드 베이국), 1320년 콘야를 점령한 일 칸국의 룸 총독 티무르타슈가 1324년 에레을리로 진격해오자 안탈리아로 피신하였다. 한편 그해 초엽 유누스 베이의 사후 총독위를 계승한 아들 마흐무트 베이는 백부를 몽골 측에 넘겨버렸고, 뒨다르 베이는 처형되었다. 이후 티무르타슈는 북쪽 [[게르미얀 왕조]] 방면으로 나아갔다. 일시적으로 멸망했던 하미드 베이국은 1327년 티무르타슈의 실각 후 이듬해 뒨다르 베이의 아들 이샤크 베이에 의해 재건되었지만, 안탈리아는 그와 별개인 베이국으로 이어졌다. 1330년대 안탈리아를 방문한 이븐 바투타는 그 아름다움을 극찬하였고, 주민들과 상인들이 종교나 계층에 따라 성벽으로 분리된 5개의 구역에서 거주한다고 기록하였다.[* 서유럽 기독교도 상인들은 항구에 거주. 그외에 그리스인 정교도, 유대인, 무슬림, 베이 및 맘루크는 따로 거주] 또한 도시 주변의 과수원에서는 카마렛딘이라 불리는 살구와 아몬드가 생산되며, 건과일 형태로 이집트에 수출되어 고가품 취급을 받았다고 덧붙였다. 마흐무트 베이의 사후 흐즈르 베이 (1328-55), 다드 베이 (1355-60)를 지나 메흐메트 베이의 치세에 안탈리아는 재차 외세의 위협에 직면하였다. 1361년 8월 24일, 키프로스 국왕 피에르 1세[* 1212년 안탈리아를 일시 점령했던 위그 1세의 딸 이사벨라의 증손자]는 안탈리아를 점령하였다. 서북쪽 40km 지점의 코르쿠텔리로 천도한 메흐메트 베이는 우선 키프로스 측에 대한 식량 판매를 금하고 인접국들에 도움을 청하였다. 이에 응한 [[카라만 왕조]]의 알라에틴 알리 베이는 1362년 4만 5천 대군과 8척의 함대를 이끌고 안탈리아를 공격했으나, 점령에 실패하였다. 메흐메트 베이는 지하드 노력을 통해 테케 베이라는 칭호를 얻었고, 향후 그의 왕국은 테케 베이국이라 불리게 되었다. 1369년 피에르 1세가 사망하고 어린 아들 피에르 2세가 계승하자 메흐메트 베이는 더욱 안탈리아를 압박하였고, 1372년부터 [[제노바 공화국]]과의 전쟁에 돌입한 피에르 2세는 결국 협상을 통해 도시를 포기하였다. 1373년 키프로스 군이 철수하자 메흐메트 베이는 마침내 수도를 회복할 수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