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창호 (문단 편집) === 초기 활동 (1910년 이전) === 현재의 [[남포시]] [[천리마구역]](광복 당시 [[평안남도]] [[강서군]] 초리면 칠리[* 북한 당국이 선전하는 '강선의 정신력'이라는 단어 유래가 바로 인근의 강서군 초리면 강선리이다]) 봉상도에서 농부인 안흥국(安興國)[* 족보명 안교진(安敎晋).]의 3남으로 태어났다.[* 순흥안씨대동보 참의공파 부분에는 정작 형인 안치호(安致鎬)와 도산 안창호 자신만이 등재되어 있다.] 당시 안씨 가문의 선산이 있는 평안남도 [[대동군]] 남관면 노남리를 속칭 '노내미'라 했고 당시 사람들은 안창호의 집을 '노내미집'이라고 불렀으며 안창호를 '노내미집 셋째'라고 불렀다. 선대는 대대로 [[평양부]] 동촌(東村)에서 살았으나 아버지 때에 [[대동강]] 하류의 도롱섬으로 옮겨 왔다. 어려서부터 미소년에 고운 목소리를 지니고 있었다고 하며 옛날 이야기책을 소리내어 읽기를 좋아해서 동네 사람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는데 동네 노인들이 저녁이면 사랑방에 모여 노내미집 셋째를 불러다가 옛날 이야기책을 읽게 했다고 한다. 평안남도 대동군 대보면 용인리에서 출생한 [[봉산군|봉산]] 김씨인 김희순(金羲舜)이 세운 한학당에서 수학했다고 한다. 후에 도산 선생은 김희순 훈장에게 보답하기 위해서 김희순의 제자 중에서 과거 급제자 4명이 있음을 기념하는 비석을 직접 세웠다고 한다.[* 평안남도 대동군 군민회가 발간한 '대동군지'라는 책에 나와 있다. 김희순 훈장의 손녀가 [[을지로]]에 있는 고기집인 [[우래옥]]의 사장이라고 한다.] 1895년 [[미국 북장로회]] 계통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가 설립한 [[경신학교|구세학당]](救世學堂, [[경신학교]])에 입학해 처음 신학문을 접했고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해 민족운동에 눈떴다. 그러나 1898년 독립협회가 해산하자 [[낙향]]하여 점진학교(漸進學校)를 세우고 교육자로 변신했다. 이 시기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마찬가지로 개신교에 입교하였으며 한국 최초의 장로교회인 [[새문안교회]]에 다녔다. 1902년 안창호는 교육 활동을 접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리버사이드에서 각종 일을 하면서 공부하는 고학 생활을 하면서도 1904년 [[의친왕]], [[정재관]] 등과 공립협회(共立協會)를 창립하였다. 공립협회는 안창호가 귀국할 무렵인 1907년에는 지방회 7곳을 둔 북미 최대의 한인자치단체로 발전했다.[* 공립협회는 이후 1909년 [[국민회]], 1910년 [[대한인국민회]]로 개편된다.] 1907년 그는 불현듯 귀국해 "대한사람은 실력을 길러야 한다."라고 역설하는 애국계몽운동을 펼쳤다. [[신민회]], [[대성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서울과 [[평양부]] 등 각지를 돌아다니며 연설을 했다. 안창호의 뛰어난 웅변은 많은 청년들에게 감동을 주어 청년들이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1908년 안창호는 [[평양부]]에 [[대성학교]]를 설립하였고 1909년 [[김좌진]], 이갑 등과 서북학회를 창립했다. 1907년에는 조선 통감으로 맹위를 떨치고 있던 [[이토 히로부미]]의 제의로 그와 회동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이토 히로부미는 "나의 모국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 중국도 함께 서양에 못지않게 발전시키는 것이 목표다. 협조해달라."면서 안창호를 회유하려 했다. 이에 안창호는 "한국의 개혁과 발전은 한국인들 스스로의 힘과 노력에 맡겨야 한다. 일본이 [[메이지유신]] 과정에서 서양의 간섭과 압력을 받았다면 지금처럼 성공할 수 있었겠는가?"라고 반박했다. [[근대화]], 서양에 맞섬 등을 명목으로 한반도를 침탈하던 일본의 [[사다리 걷어차기|기만적인 실상]]을 정면으로 지적한 것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