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직전쟁 (문단 편집) == 결과 == 차오쿤과 우페이푸에게 내려진 징계 조치가 취소되었으며 진윈펑 내각이 재출범, 직계와 봉계가 천하를 차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쉬스창은 환계에 대해 그렇게 가혹한 처분을 내리진 않았고 장쭤린도 동의했다. 직계는 반발하며 주모자의 재산을 조사하고 안복계를 숙청하며 돤치루이를 탕산에 유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7월 29일 쉬수정, 증육증, 돤즈구이, 정사원, 주심, 왕질융, 양홍지, 요진, 이사호, 요국정 등에 대한 징계와 체포령이 하달되었고 8월 4일 안복구락부가 해체되었으나 정작 돤치루이는 처벌을 면했다. 돤치루이를 처벌하라는 전문이 전국에서 쏟아졌으나 쉬스창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환계는 이 전쟁으로 엄청난 타격을 입어 상해호군사 [[허펑린]], 복건의 [[리허우지]], 절강독군 [[루융샹]]을 제외하곤 전멸하였으며 호남의 [[장징야오]]와 호북의 [[우광신]]이 거느리던 패잔병들은 지반을 잃고 떠돌아다니다가 지역군벌에게 흡수되거나 토비가 되는 결말을 맞이했다. 이들 중 손미요, 손미주 형제가 이끌던 부대는 1923년 [[임성 사건]]을 일으킨다. [[탕위린]]이 지휘하는 봉천군은 군사연습을 구실로 베이징 남원의 환군 주둔지를 장악, 동직문 안의 쉬수정의 부대 창고와 서원의 추작화의 포병대, 장빈의 무선 통신 부대, 범포강의 보병 부대 등을 접수했고 전투기 12대와 기차 100량에 달하는 막대한 양의 장비와 탄약을 차지했다. 장쭤린은 전리품들 대다수를 봉천에 보내고 차오쿤에게는 공군 탐조등 2개를 생색내기로 주었다. 화난 차오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장쭤린 이 자식, 정말로 마적 출신이군! 아직도 챙기지 못한 것이 많은 모양이니 이 탐조등 두개도 도로 갖다 주어라!" 결국 이번에는 직계와 봉계의 충돌이 이어졌고 1922년 [[1차 직봉전쟁]]으로 이어지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