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중근 (문단 편집) === 유해 발굴 시도 === 안타깝게도 안중근 의사의 유해는 아직도 발견되지 않고있다. [[김구]]는 삼의사의 유해를 찾으려 시도했으나 암살당하며 흐지부지 끝나버렸고 유해 발굴에 호의적이던 [[장제스]]가 [[국공내전]]에서 패전, 이후 공산 중국의 성립과 [[6.25 전쟁]], [[냉전]]으로 중국과 교류가 끊기다시피해 한국 측 주도로 찾는 것은 사실상 기대할 수가 없어졌다. 현재 안중근 매장 지역으로 추정되는 지역으론 둥산포, 원보산, 뤼순감옥 박물관 부지 3곳이며, 특히 원보산은 당시 뤼순감옥 전옥(소장)인 쿠리하라 사다키치의 딸 이마이 후사코의 증언 등을 토대로 2006년 남북공동조사단 등이 공식지목했다. 공산화된 중국과 우호 관계를 유지한 [[북한]]의 경우 안중근을 높게 평한 [[김일성]]은 1970년대에 직접 주석 명령을 내려 안중근 의사의 조카인 안우생 씨를 단장으로 하여 조사를 벌였고, 1986년에도 북한은 대규모 유해 발굴단을 보내 조사를 벌였다고하나 둘 다 실패하였다. 또한 뤼순 주변은 대부분 1930년대 이후 여러차례 개간되어 이미 1910년대의 흔적은 거의 찾을 수 없고, 2008년 남북 공동으로 진행한 발굴 사업에서도 결국 유해를 찾지 못해 사실상 그의 유해가 고국으로 돌아올 가능성은 희박하다. [[파일:external/img.imnews.imbc.com/DN19970046-00_01264729.jpg]] 1988년 삼일절 당시 [[KBS 9시 뉴스]] 보도에 따르면, [[독립기념관]]이 안중근 의사가 순절한 뤼순감옥 [[http://news.kbs.co.kr/news/view.do?ncd=3678404|최근 사진을 처음 입수해 공개했고,]] 1997년 광복절에 [[MBC]] 측이 최초로 뤼순감옥을 취재하여 시청자들에게 최초로 안중근 의사가 처형된 곳을 공개하였다. 공개 당시 뤼순감옥은 소재지가 군항지라 군사기밀 보호를 이유로 외국인 방문이 금지돼 있어서 취재 직전까지 공식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지만, 당시 MBC가 처음으로 취재 비자를 받아서 뤼순 형무소에 남아 있는 안중근 의사의 발자취를 시청자들에게 공개하였다.[* [[https://imnews.imbc.com/replay/1997/nwdesk/article/1984502_30717.html|안중근 의사 순절한 중국 여순 형무소 취재]]] 당시 [[MBC 뉴스데스크]]에 보도된 여순 형무소에서 안중근 의사 시신 수습에 대해 말하자면 >'''형장에 걸린 밧줄에서 수직으로 2m쯤 아래에는 나무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는데, [[교수형]]을 당한 시신을 바로 이 상자 안으로 떨어뜨린 뒤 흙으로 덮으면 사형 집행이 모두 끝나는 형식으로 사형이 이뤄졌다. 안 의사의 처형은, 그러나 이곳이 아닌 본관과 교수 형장 사이의 공터에서 비밀리에 이루어졌다. 남은 것은 안 의사가 처형된 곳임을 알리는 현판 하나가 전부. 사형을 당한 시신들은 나무 상자에 넣어져 땅 속에 묻혔다. 이 중 어딘가에 안 의사의 유해가 있지만 아직까지는 찾지를 못했다. 안 의사의 시신이 어디에 묻혔는지에 대한 기록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 >- [[MBC]] 뉴스데스크 1997년 8월 뤼순 형무소 안중근 의사 순절 현장 취재 내용 2010년 3월 중엽, 정보 통제 기간이 끝난 [[일본]]의 기밀 정보 중 일부가 [[https://www.nocutnews.co.kr/news/695848|일반 정보로 풀리면서,]] 일제가 안중근 의사를 체포한 이후 철저하게 감시했고 재판에도 직간접적으로 개입하였단 자료가 튀어 나왔다. 그동안 일본은 안중근 의사의 체포와 이후의 심문과 사형에 이르는 재판 과정에 일체 개입을 하지 않았으며, 당시 효력을 발하던 국제법에 따라 매우 공정한 재판을 진행했다고 주장해 왔으나, 풀려버린 자료에 이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내용이 다수 실려 있어 결국 사과의 의미로 유해 발굴에 협조하겠다는 공문을 보내왔고 중국 정부도 당시 재판 과정에 대한 책임을 마무리 하기 위해 협력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동년 9월 조선일보가 뤼순감옥 밖 500m 야산이라 주장했고, [[대한민국 정부]]는 이를 마지막 기회로 보고 한중일 공동 유해 발굴단이 결성을 의제로 추진하게 되었으나 이렇다할 결실은 거두지 못한 채 흐지부지 끝나 버렸다. 당시 [[시사IN]]은 윤원일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사무총장의 말을 인용해 "이는 새 기념관 건립 모금을 위한 것"이라고 [[https://m.sisain.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5553|주장했다.]] 결국 안중근은 고국이 [[8.15 광복|광복]]을 맞이하였음에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그런 연유로 [[효창공원]]의 삼의사 묘역[*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에 [[가묘]](假墓, 가짜로 만든 무덤)로 비도 없이 모셔져 있다. 이후 2019년 초반 가묘 표지석이 정식 비석으로 바뀌었지만 여전히 비석 뒤의 무덤은 가묘이다. 혹시나 희박한 확률로 차후에 안중근 의사의 유골이 발견된다면 효창공원의 독립묘역은 "사의사 묘역"으로 이름이 바뀔 것이다. 그러나 남북관계가 다시 해빙무드로 들어선 2018년 8월 14일, [[문재인]] 대통령이 독립유공자·유족 초청 청와대 오찬에서 북한과 안중근 의사 유해발굴을 공동 추진하겠다고 입장을 표했다. 2019년 5월에는 기독교 묘지에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옮겼다는 당시 러시아 언론의 기사가 발견되었다. 이에 따라 수소문끝에 1880년대에 덴마크인이 뤼순에 기독교 묘지를 만들었고 일부가 남았다는 것을 알게되어 조사에 나설 것이라고 한다. 생전 독실한 천주교 신자라, 충분히 신빙성 높은 이야기다. >안중근의 둘째 동생은 안중근 처형 집행 이전에 당국을 향해 안의 유해를 한국 원적지에 옮겨 매장할 수 있도록 간절히 요청했다. 이에 당국에서는 부득이 규정을 내세워 사형수의 유해는 감옥이 관리하고 있는 사형수 공동묘지에 매장한다고 답했다. 안중근의 둘째 동생은 곧바로 안중근과 일정한 친분관계가 있는 전옥(典獄)에게 부탁했다. 전옥은 고심 끝에 둘째 동생에게 파격적으로 하얼빈의 소나무로 만든 관으로 유해를 안치하고 조선 풍속에 따라 백포(흰천)를 씌우도록 허락하여 한국의 풍속을 따를 수 있게 했다. 그리고 일반 사형수와는 다른 규정을 적용하여 해당 영구를 감옥 내 교회당에 안치한 다음 우덕순 이하 3명의 죄수들에게 안중근의 영구에 고별식을 갖도록 했다. 우덕순 등 3명의 죄수들은 안중근의 영구 앞에서 감개무량함을 금치 못하고 조선인의 예법에 따라 땅에 꿇어앉아 두 번 절을 했다. (하략) >---- >성경시보 2022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 의거 113주년을 맞아 실시한 국가보훈처 브리핑 - [[https://blog.naver.com/mpvalove/222910876385|안중근 의사의 유해는 어디에? - 순국 당시 중국 현지 신문 기사 발굴·공개]] 위의 기사는 국가보훈처와 주상하이총영사관이 독립유공자 발굴·포상에 필요한 입증자료 수집을 위해 지난 1년여간 공동으로 '일제강점기 중국에서 발행된 신문 및 간행물 88종' 중 독립운동 관련 기사를 발췌 후 분석하는 과정에서 발굴된 것으로 해당 기사로 안 의사의 유해가 당시 [[여순감옥]] 내 공동묘지에 매장되었을 것이라는 유력한 가설을 한 번 더 뒷받침할 수 있었으며, 안 의사의 유해가 하얼빈 소나무로 제작된 관에 안치됐다는 내용을 여순감옥이 위치한 중국 만주 현지 보도 기사로 처음 확인할 수 있었다. >1909년에 하얼빈에서 나라의 원수인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의사 안중근씨는 그 다음 해에 여순 감옥에서 처형됐다. 그의 친동생 등이 그의 유해로 장례를 치르고자 했으나, 일본 관리들이 그 유해를 강탈하고 내주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했다. 안중근의 모친 조씨는 이 소식을 듣고 분노하여 두 아들 정근과 공근 둘을 데리고 조국을 떠나 북러시아 영토로 이주하여 십수년의 세월에 걸쳐 꾸준히 애국 사업에 노력했다. 이후 1919년에 한국에서 3·1독립운동이 발생하자 조씨는 두 아들을 데리고 상하이로 와 광복운동에 열정을 쏟았다. 올해 봄에 뜻밖에 병에 걸려 영국 조계지의 덕국의원(德國醫院)에 입원해 몇 개월간 치료받았으나 큰 효과가 없어 7월 15일 오후 11시에 서거하시니 향년 66세였다. 상하이의 한국 교포들도 그녀의 평생 사업을 추모하여 애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에 특별히 사회장을 거행하여 19일에 발인하기로 결정했다. >---- >민국일보, 1927.7.19. 또한 이 기사로 안 의사의 순국 이후 그를 계승하여 러시아와 상해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조마리아 여사와 안 의사 형제들의 삶 또한 조명되었다. 그동안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 상해 한인교민단 교민장으로 알려졌던 조마리아 여사의 장례식이 그보다 높은 사회장으로 치러졌다는 점을 새롭게 확인할 수 있었다.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55/0000672685?sid=104|[취재파일] 안중근 유해 찾기 키워드 ① - '감옥서의 묘지'가 어딘가?]]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55/0000672855?sid=104|[취재파일] 안중근 유해 찾기 키워드 ② - 주목해야 할 '둥산포' 묘지]]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55/0000673075?sid=104|[취재파일] 안중근 유해 찾기 키워드 ③ - 최후 형무소장 '타고지로'의 악행]]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55/0000673191?sid=104|[취재파일] 안중근 유해 찾기 키워드 ④ - "안중근 의사는 침관에 누워 계신다"]]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55/0000683785?sid=104|[취재파일] 안중근 유해 찾기 키워드 ⑤ - "어렵고 힘들다"는 건 국민도 다 압니다]]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55/0000720594?sid=104|[취재파일] 안중근 유해 찾기 키워드 ⑥ - 안중근 기념관은 돌아오는데…]]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55/0000721484?sid=104|[취재파일] 안중근 유해 찾기 키워드 ⑦ - 사라진 안 의사 가족의 유해]]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55/0000732451?sid=104|[취재파일] 안중근 유해찾기 키워드 ⑧ - 안중근 의사 동생 안정근 선생 거주지를 찾아냈다]]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55/0001010933?sid=102|[취재파일] 안중근 유해 찾기 키워드⑨ - '하얼빈산 소나무관'이 최선입니까?]]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