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중근 (문단 편집) === [[이토 히로부미]] 저격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 || [[파일:안중근장군.jpg|width=100%]] || ||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플랫캡]]을 쓰고 [[폴로코트]]로 추정되는 코트를 말쑥하게 차려입은 모습. 의거 당시에도 이 차림이었다. || [[1909년]] [[10월 26일]], [[청나라|중국]]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사건이 유명하다. [[하얼빈 의거]] 참조. 다만 안중근 본인은 이 일을 의거가 아닌, [[김두성]]의 명령을 받고 대한의군 참모 중장의 군인 신분으로 적국의 장수를 처단한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실제로 안중근은 대한의군 소속으로 활동했다. 안중근과 거사를 함께한 유동하 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거사일 당시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을 몰랐다고 한다. 알고 있는 것은 대략적인 얼굴상과 특징 뿐이었는데, 사진을 구하기 쉬운 때도 아니었거니와, 이토 히로부미가 [[원태우]]의 돌팔매에 중상을 입고 죽을 뻔한 일을 겪은 뒤로 자신의 사진이 시중에 나도는 것을 극히 제한했기 때문이다. 안중근은 하얼빈역에 이토 히로부미가 나타난다는 소식을 듣고 [[우덕순]]과 러시아어 통역 담당 [[조도선]], [[유동하]]와 조를 나누어 우덕순과 조도선, 유동하는 차이쟈거우(蔡家溝) 역에, 안중근은 하얼빈역에 매복했다. 하지만 차이쟈거우(채가구) 역의 지하 숙소에 매복하던 우덕순과 유동하는 기차가 멈춘 4분 동안 문이 잠기는 바람에 거사를 일으키지 못했고, 기차는 그대로 하얼빈 역에 정차했다. 안중근이 이토 저격을 성공한 후 유동하 의사가 멀리서 이를 지켜보고 만세를 외쳤다는데 기록마다 차이가 있다. 조를 나눌때 채가구에 우덕순, 조도선, 하얼빈에 안중근과 유동하로 나누었다는 다른 기록이 있다. 거사 당시 다른 인물들의 동선을 파악하기 쉽진 않은데 국가보훈처 기록에는 정황이 이렇다. 일단 우덕순 조는 역 구내 숙소에서 새벽부터 대기하다가 조도선이 역 매점 주인에게 일본의 대신(이토)이 온다는 것 때문에 러시아 군대의 경비가 철통같아 나갈 수가 없다는 얘기를 전했고 우덕순은 거사를 포기하고 대기 중이였다. 또는 이를 수상히 여긴 러시아 군인들에 의해 감금 상태였다. 유동하는 통역과 두 지점 사이의 연락을 담당하였는데 이때 뒤늦게 안중근과 합류했거나 처음부터 안중근을 보조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한편 러시아 당국은 이토 일행의 안전을 위해 하얼빈 역 현장을 엄격히 통제할 예정이었지만 일본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가 '많은 일본인들이 역 앞에서 이토 일행을 환영할 수 있도록 허용해 달라'고 요청해 경호를 강화하지 않았다. 플랫폼에 이토가 하차했을 땐 워낙 많은 수행원들이 함께하여 도저히 누가 이토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래서 체념하던 순간에, 이토의 하얼빈 방문을 환영하는 현지 [[일본인]] 환영객들 중 누군가가 이토의 이름을 부르자 이토가 뒤를 돌아서서 손을 흔들어준 덕분에 안중근이 이토의 얼굴을 확인하고[* 유동하 친척의 증언이다.] [[FN M1900]]으로 3발 저격했고 그 주위의 일본 측 인물도 혹시 몰라 4발 저격했다. 제1탄은 이토의 오른팔 윗부분을 관통하고 흉부에, 제2탄은 이토의 오른쪽 팔꿈치를 관통해 흉복부에, 제3탄은 윗배 중앙 우측으로 들어가 좌측 복근에 박혔다. 3발 모두 급소를 맞혔다고 한다. 그리고 남은 총알로 일본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川上 俊彦), 이토의 수행비서 모리 다이지로(森 泰二郞), 만주철도 이사 다나카 세이타로(田中 淸太郞)에 각각 1발씩을 맞췄다.(안중근 의사의 자서전에 따르면 이토를 저격한 후 혹, 자신이 이토가 아닌 무고한 늙은이를 살해한것인가 생각이 들어 이토 주변의 남자들을 저격했다고 한다.)[*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3920|네이버 캐스트 '안중근']]과 원재훈의 '안중근, 하얼빈의 11일' 참조.] 그리고 총알 한 발을 남기고 체포된다. 여기서 이 한 발을 자결용이라고 추측하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이 아니다. 안 의사는 당시 자결할 생각이 없었고 이토 처단 후 재판에서 이토의 죄를 낱낱이 밝힐 생각이었다고 여러 번 진술했다. 그리고 가톨릭에서 자살은 죄악이다. 총알 한 발을 남김은 이미 이토가 쓰러져서 더 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http://m.yna.co.kr/kr/contents/?cid=AKR20160323193400004&mobile|#]][* 이 총알 한 발을 메시지로 해석하는 이야기도 있다. 당시 안 의사는 이토를 저격하고도 혹여 변장했을까 싶어 이토 주변의 일본인들도 저격했는데, 이토가 쓰러졌으니 쏘지 않았다 하면 모순이라는 것. 이 관점에서의 해석은 자신이 무차별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테러리스트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1발을 일부러 남겼다는 것이다.] > 안중근이 외친 "꼬레아 우라"는 보다 정확하게는 "꼬레아 후라"로 [[러시아어]]가 아닌 [[에스페란토]]다. 러시아 말이었다는 주장은 공판에 넘어가기 전 검찰관 신문에서 안중근이 "러시아 말로 꼬레이 우라를 삼창하고, 또한 한국어로 대한국 만세를 외칠 때 러시아 국가의 관헌에게 체포됐다."고 한 진술에 근거한다. 그러나 이 검찰진술은 안중근이 조선어 진술을 통역하고 기록하는 과정에서 생긴 두 가지 잘못된 오류가 있어 근거로 신뢰하기 어렵다. 검찰신문의 첫째 오류는 처음엔 러시아 말로, 이어서 한국말로 대한국 만세를 외친 것처럼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며, 또 하나는 러시아 말로 꼬레이 우라 라고 외쳤다 했으나 이 꼬레이는 러시아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러시아 말로 한국은 '까레야' 다. 안중근의 진술을 통역하고 일본어를 받아 적는 과정에서 들리는대로 받아적은 입회서기의 실수로 "꼬레이"라는 정체불명의 언어로 기술된 것. 1910년 2월 7일 열린 관동도독부 법정 공판과정에서 판사가 "어느나라 말로 대한국 만세를 외쳤냐"고 물었고 안중근은 이에 대해 "세계에서 보통 널리 쓰이는 언어로 "코레아 후라"라고 외쳤다고 대답했는데, 공판 다음 날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은 안중근이 "세계공통어"로 만세를 불렀다고 보도했고 2월 13일자 대한매일신보는 "세계통행어"로 만세 불렀다고 보도했으며 2월 15일자 황성신문 역시 세계공통어로 외쳤다는 기사를 내 보냄으로서 에스페란토 임을 확인하였다. 한편 Korea hura!는 에스페란토 이므로 안중근이 외친 대한국 만세는 세계공통어 에스페란토 였음이 확인되었다. >---- >- 참조: [[https://blog.naver.com/puramo/222130965596|안중근 에스페란토로 '대한국 만세!'를 외치다]] >"코레아 후라"[* "Korea Hooray(Hurrah)!"로 보인다]([[대한독립만세|대한 만세]]![* [[http://blog.ohmynews.com/kimsamwoong/188490|안중근이 근왕(勤王)주의자인지 공화주의자인지는 아직까지 논쟁거리이다.]] 즉, 그가 대한 제국 만세의 의미로 외쳤는지, 아니면 국체와 상관없이 한국 만세의 의미로 외쳤는지는 아직도 명확하지 않다.]) 안중근의 저격을 받은 이토 히로부미는 그 즉시 병원으로 이송하기 위해 열차 안으로 옮겨졌지만 저격당한지 30분만에 사망했고, 일본 정부는 이토의 장례를 국장으로 후하게 치러줬으며 [[야마구치현]] [[히카리시]]의 한 박물관에서는 이토가 사망했을 당시에 입고 있었던 [[내복]]을 보관하고 있으며 그 내복을 통해 어디에 총탄을 맞았는지 알 수 있다. >검사 미조부치 다카오(溝淵孝雄)[* 이 사람은 아래의 15가지를 듣고 그대는 정말 깊은 뜻을 품고 행동했다면서 사형 받는 일은 없게 해 보겠다고 칭찬했다고 한다. 그러나 7번째 심문까지는 점잖았던 태도가 안중근을 살인범으로 대하라는 명령을 받은 뒤 8차 심문부터는 고압적이고 험하게 바뀌었다.]의 심문을 받을 때 제시한 이토 '''히로부미의 죄악(罪惡)''' >하나. [[1867년|일천팔백육십칠년]], 대일본 [[명치천황]][* [[메이지 덴노]]가 붕어하고 [[다이쇼 덴노]]가 즉위한 해는 1912년이므로 의거가 일어난 1909년에는 연호를 붙인 '메이지 덴노'가 아니라 현임 군주라는 의미의 '금상 폐하'로 불렸다. 연호를 붙인 건 죽은 이에게 붙이는 시호에 해당하므로 생존 덴노에게는 쓰지 않았다. 그러나 원문을 적어놓은 공사관 기록 홈페이지에는 메이지 덴노로 적혀 있어 이해하기가 어려운 부분이다.] 폐하 부친 [[고메이 덴노|태황제 폐하]]를 시살(弑殺)한 대역부도의 죄.[* [[메이지 덴노]]의 아버지 [[고메이 덴노]]는 1867년 급사하였는데, 공식 사인은 천연두지만, [[에도 막부]] 측의 암살 또는 그가 토막에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에 불만을 품은 존왕파 측의 암살이라는 설도 있다. 즉 이 부분에서는 존왕파의 [[이와쿠라 토모미]]가 사주를 받은 이토가 고메이 덴노를 독살했다는 주장을 취한 것이다. [[메이지 덴노 대역설]] 문서 참조. 다만 이 음모론은 제법 유명한 [[카더라]]이기는 하나 사실로 밝혀진 바는 없는 설이므로 주의.] >둘. [[1895년|일천팔백구십오년]], 자객들을 황궁에 돌입시켜 [[명성황후|대한 황후 폐하]]를 [[을미사변|시살한 죄.]] >셋. [[1905년|일천구백영오년]], 병사들을 개입시켜 대한 황실 황제 폐하를 위협해 [[을사조약|강제로 다섯 조약을 맺게 한 죄.]] >넷. [[1907년|일천구백영칠년]], 다시금 병사들을 이용해 칼을 뽑아들고 위협하여 [[정미7조약|강제로 일곱 조약]]을 맺게 한 후 [[고종 황제|대한 황실 황제 폐하]]를 폐위시킨 죄. >다섯. 한국내 산림과 하천 광산 철도 어업, 농, 상, 공업 등을 일일이 늑탈(勒奪)한 죄. >여섯. 소위 제일 은행권을 강제하여 한국 내의 땅들을 억지로 팔게 만든 죄.[* 지폐 이전에 사용된 동전의 경우 구한말 한국 황실이 마구잡이로 찍어내는 등의 폐해가 컸다는 점과 휴대가 용이한 지폐가 보급되자 민중의 반응은 긍정적이었다는 점, 안중근이 과거 집필한 동양 평화론에서 한중일 삼국의 화폐 통합을 주장한 점을 들어 이 부분에 대해 되는대로 핑계를 댄 것이라 주장하는 [[친일반민족행위자]]와 일본 학자들이 소수 존재한다. 하지만 삼국 화폐 통합은 어디까지나 한중일 삼국의 대등한 관계를 전제로 한 것이며, 이미 화폐 정리 사업을 진행할 당시 일본의 행보는 안중근의 동양 평화론과는 거리가 멀어진 상태였다.] >일곱. 국채 일천 삼백만 원을 한국에 강제로 지게 한 죄.[* 각종 불평등 조약을 통해 대한제국의 시설 개선, 개혁 등의 명목으로 강제로 진 빚이다. 당시 대한 제국 1년 예산이 600만원 정도였으므로, 2년치 예산이 넘어가는 셈. 이 빚을 갚는다는 명목으로 시작된 운동이 바로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이다.] >여덟. 한국 학교 내의 서책을 압수하여 불사르고, 내외국의 신문을 인민들에게 전달하는 것을 막은 죄. >아홉. 나라의 주권을 되찾고자 하는 수많은 의사들의 봉기를 폭도라며 쏴죽이거나 효수하고 심지어 의사들의 가족까지 십수만인을 살육한 죄. >열. 한국 청년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한 죄. >열하나. 소위 한국 정부의 대관이라는 [[을사오적|오적]], [[정미칠적|칠적]] 등 [[일진회]] 놈들을 통해 일본의 보호라는 헛소리를 운운한 죄. >열둘. [[1909년|일천구백영구년]] 또 다시 거짓으로 [[기유각서|5가지 늑약을 맺게 한 죄.]] >열셋. 한국 삼천 리 강산을 욕심내어 일본의 것이라 선언한 죄. >열넷. 이천만 생령의 살육의 곡소리가 하늘에 끊이질 않고 포성과 총알이 비 오듯 쏟아져 숨쉴 틈 없는 와중에도 한국이 무사태평한 것처럼 [[명치천황]]을 속인 죄. >열다섯. 동양 평화의 영위를 파괴하여 수많은 인종의 멸망을 면치 못하게 한 죄. >---- >[[http://db.history.go.kr/id/jh_097r_0010_1440|한국사 데이터 베이스 - 주한 일본 공사관 기록 통감부 문서 7권]][* 안중근 기념관에서 실문서를 확인 가능하다.] / [[http://www.newsis.com/ar_detail/view.html?ar_id=NISX20140326_0012811935&cID=10101&pID=10100|싱가포르 영자신문 기록]]. 내용과 순서가 다르다. 원래대로라면 러시아에서 수완을 쌓은 독립 운동가 [[최재형(독립운동가)|최재형]]의 지원을 받아 제삼국인 러시아에서 공정한 재판을 받아야 하였으나, 아래 법률적 평가 문단에서 나오듯 일제의 압력을 따른 러시아측 행정명령에 따라 러시아 검찰 조사 도중 하얼빈 일본 영사관을 거쳐 [[뤼순]](현재는 [[다롄]]의 일부)에 있는 [[일본]] 고등법원으로 송치되고 만다. 의거 소식이 들리자 한국인 안병찬은 물론 러시아의 콘스탄틴 미하일로프, 영국인 더글라스, 스페인 변호사, 심지어 일본[* 크게 놀랄 일은 아니다. 만화 [[바람의 검심 -메이지 검객 낭만기-]], [[맨발의 겐]], [[왕도의 개]]의 내용이나 혹은 대한민국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은 [[후세 다쓰지]], [[가네코 후미코]], 현재도 있는 [[일본 공산당]]처럼 일본 내에서도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세력은 주류가 아니었을 뿐이지 언제나 있었다. 실제로 [[김두봉]]의 [[조선의용대]] 설립에 있어서 [[중국국민당]] [[장제스]]를 설득한 이 역시 [[국공합작]]에 참여하고 있었던 일본인이었다. 또 딱히 일본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알아두면 좋은 일본사 중 일면은, [[메이지유신]] 당시 유신반대세력(전통유지파, 온건개화파)은 현대의 일본중심지들이 아닌 소외된 지역의 주민들이 많았고, 그래서 이 지역 주민들은 일본이 개화된 후에도 정부의 뜻을 별로 지지하지 않고 있고, 지금까지도 안중근 의사를 기리는 의식을 행하고 있다는 부분이다.]에서까지 수많은 국제변호사들이 안중근의 변론을 맡겠다고 몰려들었다. 그러나 선임은 불허되었고, 일제 측의 형식적인 절차로 관선변호사인 미즈노 키치타로와 카마타 쇼지가 변론을 맡는다. 재판장은 마나베 주조, 검사는 미조부치 다카오가 각각 맡았다. [[https://blog.naver.com/minsu977/221160757326|안중근 의사 공판 기록 번역 #1]] [[https://blog.naver.com/minsu977/221160763761|안중근 의사 공판 기록 번역 #2]] [[https://blog.naver.com/minsu977/221160767464|안중근 의사 공판 기록 번역 #3]] 안 의사는 대체로 법정에서 사실관계보다는 [[제국주의]]에 근거해 조선의 자주성이나 역사를 완전히 부정, 폄하하고 [[식민지 근대화론]]에 가까운 주장을 펼치는 검사를 상대로 사상적 싸움을 벌이며 자신의 정치적 주장을 알리고자 했다. 메이지 천황의 존엄성을 고종의 그것과 같이 긍정하고, 아시아 각국에 대해 선진국인 일본이 일정한 수준의 우위를 갖고 영향력을 끼치는 것은 인정하되 일방의 착취적 식민지 관계를 부정한 채 어디까지나 각국은 자주 독립을 보장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했고 일본이 한국을 보호한다는 것은 명목상일 뿐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토가 중간에서 이러한 대의를 왜곡하여 많은 한국인을 살상하고 국가적 존엄과 주권을 박탈하였으며, 특히 굴욕적인 조약들을 강요했다는 취지의 [[아시아주의]]에 근거한 주장을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단, 공판 기록에서 보이는 안 의사의 주장에는 침략국인 일본 자체에 책임을 돌리기보다는 한국에서의 지명도가 높을 뿐인 '''역적 이토'''에게 모든 분노와 비난의 화살을 돌리는 것과 같은 뉘앙스가 상당히 짙게 배어 있다는 한계가 있다. 실제 이토만 죽으면 통감정치가 폐지되고 보호정책이 없어질 거라고 믿냐는 검사의 질문에 안 의사는 그렇다고 대답했으며, (군주인 메이지 천황과 인민들의 눈을 가리는) 이토만 없어지면 일본 인민들이 자각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답했다. 그러나 이는 모두 현실성이 매우 희박한 이야기다.] 특히 상기의 거사 이유 중 책에서 보았다며 항간에 떠도는 [[고메이 덴노]]의 시해 설을 언급했을 때는 재판장이 놀라서 방청객을 퇴정시키는 소동이 벌어졌다고 한다. >문: 일본이 세계에 대해 그렇게 선언(한국 보호는 동양평화를 위함)했는데 그 실(實) 한국을 병합하려고 하면 그것을 열국이 묵인하고 있을 것 같은 일이 있을까. >답: 예를 들어 말하면 여기 한 마을에 3형제가 있는데 [[청나라|형]]은 제일 많은 자산을 가지고 [[대한제국|그 다음 형제]]는 가난하고 또 [[일본 제국|셋째 아우]]는 다소 자산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동학 농민 운동|어떤 때 그 가난한 형제의 가족이 싸웠던 바]], [[톈진 조약|첫째 형이 와서 제지하였는데]] [[제물포 조약|셋째 아우가 와서]] 제지하고 있는 형이 폭행하는 것으로 오해하고 마침내 [[청일전쟁|형과 셋째 아우와의 싸움]]이 된 것을 [[삼국간섭|이웃 사람이 보다 못해 마침내 이를 제지하였다]]. 그런데 형은 기뻐하여 싸움을 중재해준 사람에게 전지(논밭)을 사례로 주었다. 그것을 셋째 아우가 불만으로 생각하고 즉 자기를 빈정대는 것으로 생각하고, 우마를 사고 몸을 장식하고 사치하였으므로 차재(빚짐)하게 되니 자포자기하여 늘 사람과 싸움을 하였으므로 사람들은 싸움쟁이라고 말하고, 본인은 대단한 차재를 하여 할 수 없게 된 결과 하나의 간책(간교한 꾀)를 써서 가운데 형의 재산을 횡령하려고 타인에 대해 가운데 형이 나한테 후견인이 되어 달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했으면 좋을까 하고 말하니, 타인은 그가 싸움쟁이라 끌려 들어가지 않으려고 '좋겠지' 하고 말했으므로 만족하고 [[을사조약|드디어 후견인이 되어]] 가운데 형의 집으로 들어가 전지를 제멋대로 경작하고 횡포를 멋대로 하며 박해를 가하는지라 가운데 형은 늘 비통해 하고 있었다. [[강대국|사람들]]이 모이어 [[일본 제국|셋째 아우]]를 징치(징계하여 다스림)해 줄 의논을 하였는데 그 중의 어떤 사람은 셋째 아우를 징치하는 김에 형 두 사람의 재산도 횡령하는 것이 어떠냐고 말했는데 그 부근 사람은 셋째 아우의 일족이 모두 나쁜 것이 아니고 그 집의 [[이토 히로부미|이토]]란 놈이 나쁘다고 말했다. >즉 [[아시아주의|이 3가는 형제라는 것은 분명하므로]] 동심(한마음)으로 그 사람에 당하면(그 사람들에 맞서면) 3가를 안전히 유지할 수 있는 것으로, 지금 동양 각국이 모두 손을 이끌고 힘을 같이 하면 인구가 5억 있으니 어떤 나라도 당할 수 있다. 그런 것을 자기가 주리고 있으므로 남을 먹이로 하여 혼자서 일치를 방해하고 있는 것과 일반이다(같다). 즉 이토의 하는 짓은 위에서 말한 가운데 형을 먹이로 한 셋째의 아우와 동일하여 이토의 정책이 좋지 않았으므로 한국에는 [[의병|폭도]]가 일어나고 인민의 거주도 완전하게 할 수 없게 되어 식민정책의 실적이 조금도 오르지 않고 중국까지도 감정을 해쳐 그 나라는 현재 [[청일전쟁|일청전쟁]]의 원수를 갚으려고 일반으로 기대하고 있음은 내가 중국을 순회하여 분명히 지득한(알게 된) 일이며 또 미국에도 무수히 노동자를 건너 보냈기 때문에 그 나라로부터도 일본은 배척당하고 러시아도 일본에 대해 결코 호의로 생각하고 있지 않다. 특히 한국 일반 인민도 한번 일본과 교전하여 금일의 불평을 만회하려고 밤낮으로 고심하고 있음은 내가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다...(중략) >...일본이 영국과 동맹하고 있다고 말하나 그것은 영국 자국의 이익으로 하고 있으므로 결코 의뢰하기에는(기대기에는) 부족한 일이다. 그리고 미국인 중에는 일본국의 재정만큼은 일개인이 가지고 있는 사람조차 있으므로 즉 미국, 중국, 러시아가 연합하여 일본으로 향한다면 일본은 이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 이러한 상태라 열국은 조만간에 일본에 대할(적대할) 각오에서 혹은 묵인하는 태도로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또 한국도 독립할 수 없다고만 한할 수 없다. 지금도 미국 또는 포르투갈이 드디어 독립할 수 있었던 사실도 있다. 이토의 정책은 크게 그르치고 있다. 2018년 4월 20일에 일본 외무성 공문서관과 러시아 극동 문서 보관소 하바로프스크 도서관에서 '한국 주차군 참모장 아카시 모토지로 보고'라는 문서가 발견되었는데, 일본군 참모장이었던 아카시 모토지로(1864~1919)가 중국 현지 밀정들을 통해 입수한 정보로 작성한 이 문서는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의 배후를 캐내는 데 목적이 있었고, 문서에서는 안중근이 1906년 8월 고향을 떠나 [[간도]] 용정에 망명한 것은 당시 간도에서 서전학교를 세워 운영하고 있던 [[이상설]]의 문하생이 되기 위해서였다고 적고 있다(1907년 고종의 명을 받아 헤이그 특사로 갔던 이상설을 모셔오기 위한 모금운동도 안중근이 주도). 보고서에서 '안응칠은 이상설에 의탁해서 당시 미국에서 귀국한 안창호와도 합의해 [[간도]]에 갔다.', '(유럽에 머물던) 이상설을 안응칠과 동지들이 모금해 연해주로 불러들였고 안응칠은 간도에서 이상설을 사사했다.' 등 이상설과 안중근의 사제 관계를 언급한 부분이 등장하는데, 보고서 말미에는 '조선 통감부 촉탁 경시 사카이의 신문'에서 안중근이 이상설을 두고 '포부가 매우 크며 세계 대세에 통해 동양의 시국을 간파하고 있다. 만인이 모여도 상설에는 미치지 못한다. 용량이 크고 사리에 통하는 대인물로서 대신(大臣)의 그릇이 됨을 잃지 않았다.'고 호평하고 있어, 안중근의 사상에 이상설이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http://news.donga.com/3/all/20180420/89699989/1|#]]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