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중근 (문단 편집) ===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하얼빈 의거]] 이전 === 안중근은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목]] 영동방 청풍리(현 [[황해남도]] [[해주시]] 광석동)에서 아버지 안태훈(安泰勳, 1862~1905)[* 이명 안태훈(安泰勛).]과 어머니 [[조(성씨)|배천 조씨]](白川 趙氏) [[조마리아]] 사이의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안태훈은 1891년([[고종(조선)|고종]] 28) 증광시 진사시에 3등 46위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c_1891_038833|입격했는데]], 무슨 연유에선지 자신의 첫째 남동생 안태건(安泰健, 1868~?)[* 족보명 안태건(安泰建).]의 이름을 빌려 썼다. 조부 안인수(安仁壽)는 통훈대부(通訓大夫:정3품 문관의 품계) 행 진해현감(行鎭海縣監: 종6품) 겸 진주진관병마절제사(兼晉州鎭管兵馬節制使:정3품)를 지냈다. 안중근은 태어날 때 등에 검은 점이 7개가 있어서 [[북두칠성]]의 기운으로 응하여 태어났다고 하여 어릴 때에는 '응칠(應七)'로 불렸다. 전형적인 무골로 어렸을 적부터 무술을 연마한 것으로 유명하고 사격의 명수였는데 놀랍게도 기계로 쏴도 명중률이 고작 50%인 [[화승총]]으로 20보(약 10m)나 되는 곳에 놓인 동전을 맞혔다고 한다.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과 친분이 있었던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안중근을 '안씨 집안의 총 잘쏘는 청년'으로 묘사하였다.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은 [[개화파]] 청년 그룹이었는데 [[갑신정변]]으로 일본 유학([[박영효]]의 장학생)이 좌절되자 7살의 안중근과 함께 일가 친척들과 함께 [[황해도]] [[신천군]] 두라방 청계동(현 [[황해남도]] 신천군 석교리)로 이주하여 은둔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황해도 [[관찰사]](종2품) 정현석(鄭顯奭)과 해주 감사가 청계동에 지원을 요청했는데 16살의 안중근은 우수한 지도력을 발휘하여 박석골 전투 등에서 동학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1894년, 내 나이 16세에 아내 김아려에게 장가들었다. 현재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다. >그 무렵 한국 각 지방에서는 이른바 [[동학 농민 운동|동학당이 곳곳에서 벌떼처럼 일어났다.]] 이들은 외국인을 배척한다는 핑계로 군현을 가로질러 다니면서 관리들을 죽이고 백성의 재산을 약탈했다. 이것이 이후 우리나라를 위태롭게 한 바탕이 됐으며, 일본·청국·러시아가 우리나라에서 전쟁하게 된 원인이 됐다. >관군은 그들을 진압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청일전쟁|청국 군인들이 들어오고 또 일본 군인들도 건너와 일본과 청국 두 나라가 서로 충돌해 마침내 큰 전쟁이 일어나고 말았다.]] >당시 나의 아버지는 동학당의 폭행을 견디기 어려워 동지들을 모으고, 격문을 뿌려 의병을 일으켰다. 나아가 포수들을 불러 모으고, 처자들까지 대열에 편입시켰다. 이렇게 모인 정예 병력은 70여 명이 됐으며, 이들은 청계산 속에 진을 치고 동학당에 항거했다. >...(중략)... >적병의 사상자는 수십 명이었으나 우리의 의병들은 한 사람의 부상자도 없었다. >우리는 하늘의 은혜에 감사하고 만세를 3번 부르며 본래의 마을로 개선해 황해도의 관찰부에 급히 승전 보고했다. 당시 일본 하급 장교인 스즈키란 자가 군대를 이끌고 지나가다 우리가 동학당에 승리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신을 보내어 축하의 뜻을 표한 적이 있었다. >이후 적병들은 소문을 듣고 멀리 달아나 다시는 더 싸움이 없었고, 차츰 잠잠해져서 나라 안이 다시 태평해졌다. >---- >안응칠 역사 3년 뒤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은 다시 정부 문서에 등장하는데, 내무대신인 [[남정철]]이 쓴 보고서에 따르면 안태훈이 동학농민군 향장(鄕長) 유만현(柳萬鉉)[* 1895년([[고종(조선)|고종]] 32) 11월 24일 [[신천군]]수에 임명되었던 적이 있다.[[https://db.itkc.or.kr/dir/item?itemId=ST#/dir/node?dataId=ITKC_ST_Z0_A32_11A_24A_00100|#]]]을 제거하고 빼앗은 [[세금]]을 마음대로 썼기 때문에 이를 원상 복구하라는 내용이다.(1897년 5월 6일자 조회 제6호) 안중근은 동학 농민군이 버리고 간 쌀 500석을 군량미로 썼다고 한다. 이때 안태훈은 천주교회를 찾아가 [[프랑스인]] [[니콜라 빌렘]](한국명 홍석구) [[신부(성직자)|신부]]의 도움을 받았으며, 안중근은 [[사도 토마스]]의 이름을 [[세례명]]으로서 받게 됐다. 일제의 침탈이 사실상 국권을 뒤흔드는 수준으로 확대되자 항일무장투쟁으로 노선을 바꾼 안중근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한 후 우덕순과 더불어 의군을 조직하였다.[* 여담으로 두만강을 건너 일본군을 격파할 당시 일본 포로들을 잡았었는데, 포로들이 자비를 호소하자 안중근은 그들을 기꺼이 풀어주었다고 한다. 당연히 참모들은 그에게 항의를 하기도 했지만, 안중근은 그런 그들에게 "그렇게 하자면 4천만 일본 국민 모두를 죽여야 하는데 그럴 수 있냐. 정의의 군대는 정의롭게 싸워야 한다"고 반문하자 아무도 반박을 못하였다고 한다.] 처음에는 회령 방면으로 진출하면서 몇번 승리를 거두기도 했으나, 스파이의 거짓 안내와 병력 열세 등 모든 면에서 불리했기에 결국 패배하고 우덕순은 일본군에 잡히고 자신과 몇몇 동료들만 목숨만 건져 가까스로 살아 탈출하는데 성공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