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중근 (문단 편집) == 평가 == [[대한민국]]에서 [[의사(동음이의어)#s-4|의사(義士)]]로 추앙받으며 항일 활동가 가운데 거의 첫 번째로 꼽힐 정도로 이름 높은 독립운동가이다. 드높은 애국심을 품고 의거 이후에도 성인(聖人)의 자세를 지켜 마지막까지 일제의 유혹을 뿌리친 진정한 [[애국자]]이며, 그의 올곧은 정신과 이를 잘 드러내주는 서예 작품들 또한 매우 높은 평가를 받는다. 안중근의 유묵은 안중근이 전문 서예가로서 유명세를 떨치지 않았음[* 진품명품에서도 나왔듯이 교과서적인 측면에서 대단히 잘 쓴 글씨는 아니다. 그러나 서예는 당시 지체 높은 사대부 집안이라면 필수 소양이었는데 이는 서예를 일종의 인격수양 수단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히려 글씨가 얼마나 멋들어지게 쓰여졌느냐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부분이 어떤 사람이 그 글씨를 썼느냐 하는 부분이다. [[이완용]]이 기교적인 면에서 글씨를 굉장히 잘 썼지만, 지금 그의 작품들은 인사동에서 몇 만원, 몇십만원 선에 겨우 거래되는 수준이다.]에도, 또한 비교적 최근의 저작물임에도 대한민국 보물 제569호로 지정되어 국가적 관리를 받는 것만 봐도 미뤄 짐작이 가능하다. "온건론자인 [[이토 히로부미]]를 죽여 [[한일 강제 병합]]을 앞당겼다"는[* 이는 온건론자 라는 말을 '병합 반대자'로 왜곡 해석하거나, 혹은 이토가 병합을 반대했다는 왜곡이 불러일으킨 오해이다. 그러나 이토 히로부미는 강경파들에 비해 원칙적인 합병을 주장한 온건파인 것은 사실이다.] 견해가 있는데, 이미 대한제국의 외교권도 박탈하고 [[조선총독부]]의 전신인 [[통감부]]를 설치하는 등, 식민지배의 사전 정지작업인 [[을사늑약]]과 [[대한제국 군대해산]] 등에 이토 히로부미가 활발히 참가해 왔었고 조선을 일본에 종속시키려는 장기적인 계획이 일본 내에서 꾸준히 논의되어왔으며(대한시설강령 등) 일본의 각의는 1909년 7월에 조선 병합을 이미 가결하고 [[가쓰라 다로]] 수상을 필두로 병합을 추진 중이었다. '''심지어 이는 이토 히로부미가 죽기 3개월 전이다.''' 어쨌거나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죽여 강제병합 시기를 앞당겼다는 것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이토 히로부미를 죽여 강제병합이 되진 않았으나, 그를 죽이면서 강경한 병합을 주장하던 세력에게 명분을 줬기 때문이다. 덧붙이면 현대에 비유하자면 만약 현대의 북한이 한국정부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국군을 모두 해산 시킨 뒤에 내정간섭을 위한 통감부를 설치한다면 한국인들은 이것을 어떻게 평가할까? 아마 대부분은 북한측의 적화통일을 위한 사전 정지작업으로 생각할 것이다. 결국 당대에 이토가 행한 일들은 모두 대한제국을 일본의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철저한 사전 정지(整地)작업이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이토 히로부미]]는 평화주의자, 혹은 친한파라고 할 수 없는 인물이다. 교양만화가 이원복 교수는 저서 <먼나라 이웃나라> 일본편 2권에선 이토는 한일합방 반대 스탠스를 취한 이유로 한일합방으로 인한 서구 열강들과의 마찰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고 견해를 제시했다. 그의 지배 구상은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시킨 뒤 실질적으로 지배하겠다는 식이었다. 또한 안중근이 누구를 저격했는가를 떠나, 처음으로 독립을 위해 일본 [[고관대작]]을 처단했기에 이후 의열단을 비롯한 독립 운동 단체들이 일본 고관대작 암살과 [[조선총독부]] 등의 기관 폭파 등을 통한 독립을 이루고자 한 계기가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