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정근 (문단 편집) === 말년의 행적 === 안정근은 홍콩에서도 공작선 건조 구상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자신이 못하면 자식들이라도 선박 전문가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차남 안진생은 부친의 뜻에 따라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났고, 그곳에서 한국 최초의 조선공학박사가 되었다. 그러나 안정근은 1939년부터 뇌병으로 고통을 받아 중국 각지를 돌며 은거 생활을 했다. 그는 그런 와중에도 1945년 3월 16일 한국구제총회 회장에 선임되어 각종 구제, 자선 보건 사업을 주관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병마가 심각해 업무를 맡지 못하고 이름만 걸어뒀을 뿐이었다. [[8.15 광복]] 후에도 한국에 돌아가지 않고 상하이에서 요양 생활을 하다 1949년 3월 17일에 병사했다. 그는 생전에 안중근의 단지를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고, 한국의 정세가 안정되면 안중근의 유해를 국내로 송환해 고향에 묻으려 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이를 실현시키지 못한 채 사망했고, 안중근의 묘소, 단지는 행적이 묘연해졌으며, 그 역시 묻힌 장소를 알 수 없게 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7년 안정근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