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정근 (문단 편집) === [[전간기]]의 행적 === 1919년 늦가을 [[상하이]]에 이주한 그는 1919년 11월 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이동휘, 내무총장 이동녕, 법무총장 [[신규식]], 재무총장 [[이시영(정치인)|이시영]]의 취임식에 귀빈으로 참석했다. 그리고 1919년 11월 20일,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차장에 추천되었으며, 동시에 대한적십자회 부회장을 제안받았다. 그는 내무차장과 대한적십자회 부회장 중 대한적십자회를 택했다. 당시 대한적십자회 회장인 [[이희경(1889)|이희경]](李喜儆)은 업무차 미국에 장기체류하고 있어서, 부회장으로 취임한 안정근이 실질적인 최고 책임자로서 적십자회를 이끌어 나갔다. 안정근은 매우 적극적으로 적십자회를 이끌어 취임 당시 999명이었던 회원을 6개월 후에는 2,128명으로 확장 시키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1919년 11월, 안정근은 임정의 지시에 따라 황해도 신천군의 조사원으로 발탁되어 신천군의 유력자, 재산가, 학교, 종교 등을 조사해 임정에 보고했다. 그러던 1920년 3월 26일, 만주에 설립된 무장독립단체인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가 임정에게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과 자신들간의 갈등을 중재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들은 군정서와 국민회에 무관한 사람으로서, 신망이 있고 군사상 지식이 있으며 명석한 두뇌와 공정성을 지닌 인물이 중재를 해주길 바랬다. 이에 임정은 안정근과 군무위원 [[왕삼덕]](王三德)을 “파견위원”으로 엄선했다. 안정근과 왕삼덕은 1920년 5월 17일 북간도에 파견되어 각 단체들의 본거지를 일일이 방문하면서 효과적인 독립투쟁을 위해서는 각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였고 임시정부의 강력한 의지를 표명했다. 각 단체들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통합조건을 고집해 통합이 쉽게 이뤄지지 않았지만, 두 사람의 노고로 의민단(義民團)과 의군단(義軍團)이 통합되었다. 대한국민회와 북로군정서는 완전통합을 이루지는 못하였지만 격의 없는 토의를 통하여 상호 긴밀한 연락과 협조를 도모하기로 합의했으며, 서간도 방면에서 군사 활동을 하고 있는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와도 긴밀한 연락과 협조를 하는데 합의했다. 이후 독립군이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의 공세에 맞서 상당한 전과를 거두자, 안정근과 [[왕삼덕]]은 이를 호기로 여기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실제보다 과장된 전과를 보고했고, 임시정부는 이를 독립신문 호외를 통해 공식 발표했다. 안정근과 왕삼덕은 통합운동의 박차를 가했고, 그 결과 대한국민회, 의민단, 의군회, 신민회, 한민회가 통합하여 대한국민회의 사령관 [[홍범도]]의 지휘 아래 연합부대를 결성하고 북로군정서의 [[김좌진]]과 협조하게 했다. 이후 [[청산리 전투]]에서도 독립군이 전력을 보존한 채 일본군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히자, 안정근은 동료 왕삼덕을 상하이로 보내 실제보다 과장된 전과를 임정에 전하게 했다. 임정은 이 보고서를 인쇄하여 각 방면에 배포하여 한국의 독립운동세력의 사기를 끌어올리려 노력했다. 한편 안정근은 부상병을 위한 구제사업에 앞장섰고, 교민들을 상대로 구호 사업을 실시하기도 했다. 안정근이 언제 상하이로 복귀했는지는 기록이 부족해 확실하지 않다. 다만 그가 1921년 11월 21일 공석 중인 대한적십자회 회장을 대신하여 총회 개회를 선포한 것으로 보아 그 전에 상하이에 복귀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대한적십자회의 향후 업무방침을 논하는 자리에서 북간도 교민과 부상병들의 참담한 정황을 설명하고 이들을 구호하기 위해서는 중국이나 러시아의 적절한 장소를 택하여 병원을 설립해야 하며, 아군 주둔지에 구호원을 파송할 것을 제안하여 성사시켰다. 또한 대한적십자총회는 그동안의 업무공백을 보완하기 위하여 임원 보궐선거를 실시했다. [[이희경(1889)|이희경]] 회장의 후임으로 [[안창호]]가 선출되었고, 결원 상태의 감사와 임원을 대신할 이들이 선출되었다. 하지만 안창호가 회장 직을 극구 사양하자, 안정근이 또다시 회장 직을 대행하게 되었다. 1922년 정월, 안정근은 <독립신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축시를 투고했다. >祝新年 >大地에 新年이 來하고 >萬里에 春風 吹하도다 >三年陰雲에 呻吟하는 半島萬象 >四年東風에 活躍하니 全球和氣로다 한편, 안정근은 1920년 안창호가 이끄는 [[흥사단]]에 입단했다. 그는 1922년 2월 4일 흥사단 강당에서 <최근 본국의 참사>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또한 그는 중국인 정원(鄭沅)이 출간한 <안중근전> 부록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을 게재했다. >나의 형님인 안중근은 여순감옥에서 임종할 때 나에게 최후의 몇 마디를 유언하였다. 하나는 조국동포들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중국동포들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조국을 위해 나라의 원수를 죽였으니 오늘 이 한 몸이 죽어도 여한이 없다. 다만 나라의 회복을 보지 못하고 먼저 죽으니 유감스러울 뿐이다. 다행으로 동포형제들이 있는 힘을 다하여 조국회복에 협력한다는 소식이 천국에 도달되면 나의 하늘에 있는 영혼과 땅에 파묻힌 유골도 당연히 즐겁게 춤출 것이다. 나는 두 나라 관계와 동양대세를 위해 이등을 죽이고 이 몸도 죽게 되니 중화민국은 나의 이 진심을 응당 이해하고 두 나라의 운명관계를 깊이 생각하며 우리 한국 2천만인과 중국 4억만인을 도탄에서 구해내야 한다. 내가 오늘 말하는 것은 한국독립이 회복되기 전에는 중화민국도 필연코 편안한 날이 없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10년 후인 나는 우리 한국독립운동을 이어 받게 되었다. 중국에 대하여 감상의 표출을 금할 수 없어 정성스러운 이 진심을 그대로 알리는 바이다. 중국의 지식인들도 일제를 섬멸시키기 위해서는 한국의 협조가 필요하다고 인식하기 시작했고, 1921년 한국인 독립운동가들과 중국인 정치가들이 연합하여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를 조직했다. 중한호조사는 중국인과 한국인의 친선을 도모했고 한국 청년의 중국 유학과 구미 유학을 위한 여권 주선 등을 수행했다. 안정근은 1923년 9월 1일 제3회 총회에서 [[여운형]], 이유필(李裕弼) 등과 함께 중한호조사의 한국측 이사로 당선되었다. 그리고 1922년 5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다. 같은 해 신한청년당 수뇌부들이 공산주의자로 변모하면서 당 내부에 분열이 생기자, 그는 [[김구]], [[김인전]] 등과 함께 탈당했다. 1923년 10월 24일, 안정근은 상해교민단 제4회 의원 선거에서 본 구역의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이후에도 정력적으로 활동하던 안정근은 1925년경 건강에 이상이 생기자 신병 치료를 목적으로 자신의 가족만 데리고 산동반도 동쪽 끝의 항구도시인 웨이하이로 이주했다. 안정근은 이 곳에서 어선 건조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어선을 건조하여 교민들에게 공급함으로써 교민들의 생계를 보장하고 기회가 되면 어선을 공작용 선박으로 개조하여 본국에 상륙하기 위한 야심찬 포부를 갖고 있었다. 이 사업은 1937년까지 진행되었지만 [[중일전쟁]] 발발 후 일제가 중국 대륙을 유린하기 시작하자 사업을 중단하고 가족과 함께 홍콩으로 피신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